솔성요론 = 제7조,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공경심을 좋지 말고 탐한 욕심이 나거든 사자와 같이 무서워 할 것이요.

사물의 내면적 진리성을 봐야....
이 조문은 사물을 접응할 때에 우리에게 두 가지 마음 표준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는 공경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신 것이요, 둘은 탐욕심을 무서워 하라는 경계의 말씀이다.
공경심
수도인은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소유나 가치에 끌려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 사물이 가지는 내면적인 진리성 불성을 보아 평등하게 대하여야 처처불상의 신앙관이 실현되어 지공무사한 마음이 양성된다.   매사에 공경심으로 대하는 것은 상대방을 부처로 섬기는 신앙행위 이전에 자기 자신을 지키고 살리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공경심을 가지고 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도를 즐기는 마음이 충만해 지고 자비심이 살아나며 불심이 확충되지만은 반대로 오만하고 함부로 대하는 마음속에는 중생의 어리석고 그른 마음이 자라나 순연한 본심이 병들고 만다.
때문에 공부하는 수도인이 매사에 공경심으로 대하는 것은 참 자기를 지키고 살리는 수행인의 기본태도라 볼 수 있다.   만일 종교인이 이 마음을 놓아버리고 함부로 육근을 동한다던가 또는 세속적인 지위나 권위에 끌린다면 그는 실을 놓고 형식을 취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종사님께서 마음을 지키고 몸을 두호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방법은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경외심)을 놓지 않는데 있다고 하시며 어느때 어디서나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을 대할 때 항시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라 하시었다.(인도품 33장)
만일 경외심을 놓고 보면 아무리 친절하고 사이 없는 부자 형제 부부사이에도 반드시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쉬우니 비록 처지가 무간하고 경계가 가볍다 하드라도 마음 가운데 공경심을 놓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을 대하고 보면 어떤 권리나 지식이나 물질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겐 마음에 없는 공경을 다 하면서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오만하게 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사람됨이 한 눈에 들어와 몹시 꺼림직하다.
탐한 욕심
둘째로 사물을 접응할 때에 탐한 욕심이 나거든 사자와 같이 무서워하라고 하셨다.
탐욕은 상도에 벗어난 지나친 욕심으로 부당하고 지나치게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마음이다.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무섭고 사나운 짐승이 사자이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탐욕의 불길이 일어나면 사자를 만난 것보다 더 무서워하라고 하였다.
10여년 전에 해인사에서 평소 아는 스님을 만나 나무 그늘에 앉아 법담을 나누려고 하는데 어느 객이 대변을 놓고 갔는지 냄새가 나서 스님 자리를 고쳐 앉을까요 하고 일문을 던졌다.   이에 스님은 내 말의 뜻을 파악하고 교무님, 지금 저 사바세계로 눈을 돌려 보세요.   이 똥 냄새보다 더 더러운 악취가 곳곳에서 나고 있습니다.   이 똥은 썩어서 풀이나 나무에 거름이 됩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는 저 탐욕의 불길은 자신은 물론이요 가정, 사회, 국가, 세계까지 병들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법담으로 시작하여 우리는 긴 시간 냄새를 잊고 얘기를 하였다.
탐욕은 대환이다.   진실로 세상의 불 보다도 더 무섭다.
불은 치성하면 물로 끌 수 있으니 탐화의 불길은 쉽사리 끌 수가 없다.   또 불은 초옥을 태울지라도 풀뿌리는 얼마 안가서 다시 자라나지만 탐화가 마음을 태우면 정법의 싹은 다시 나기 어렵다.   철이 제 몸에서 이는 녹으로 인하여 제 몸의 자멸을 초래하듯이 사람도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탐욕에 의하여 고통을 받고 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옛 조사가 탐욕생시엔 쌍안암이라 하여 탐욕이 한번 일고 보면 살인 강도 간음 할 것 없이 저지르지 않는 악행이 없으니 어찌 성난 사자에 비유하겠는가?
인생에 있어서 고통의 원인은 절대로 외부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요, 각자의 마음속에 일일시시로 일으키는 탐욕에 있음을 알아서 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청렴한 마음으로 대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본심으로 사물을 대하는 것이며 참 자기를 지키고 살리는 산 공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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