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동산에 사는 하늘 사람들
교단적 관심으로 훈련장 개발 서둘러야
1.4후퇴 때 원아들 제주도 공수작전 영화화
32년의 역사속에 어린이 사절단 역할 큰 공헌
교단의 참 뜻 심는 자선사업장

대종사님께서는 하늘사람이 하늘나라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어린이들이 바로 하늘나라 사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하늘나라사람들이 모여 사는 진달래 동산의 한국보육원 을 찾았다.   행정상 주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10번지(전화 장흥 40번).
이 땅은 대종사님께서 원기23년에 가셨던 곳으로 안내를 하던 황정신행 법사가 길가 솔잎을 무심코 뜯자 하찮은 풀포기 하나 나뭇가지 하나 꺾는 것이 곧 생명을 귀히 알지 않는 마음이 되어 큰 죄업을 짓게 된다는 법설을 하시고, 또 계곡에 흐르는 많은 물에 그대로 세수하는 것을 보시고 대종사님은 친히 손으로 물을 쥐어내어 물 밖에서 세수를 하신 후 흐르는 많은 물이라도 함부로 쓰면 다음 생애에는 물 없는 곳에 태어나 고초를 받는다는 법설을 하신 땅이다.
하늘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서울 종로 5가에서 의정부행 버스를 타고 다시 의정부에서 의정부와 서울 불광동을 내왕하는 시외버스를 20분이나 기다려 탔다.
의정부 시가지를 벗어나자 가뭄인데도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녹음진 겹겹의 산들을 지나 30분쯤 후에 신흥유원지에서 내렸다.   여기가 진달래 동산이 있는 계곡의 입구이다.   여기서부터 진달래 동산의 한국보육원까지는 3km.
한국보육원은 여러 작은 계곡들이 합쳐진 계곡의 중간지점 1만2천여평의 평지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피서객들이 찾아들고는 있어도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을 보여주었다.
1만2천평의 진달래 동산
한국보육원에는 원아 39명과 이들을 돌보고 있는 교역자 4명을 포함한 직원 9명으로 총48명이 살고 있다.
보육원의 하루는 5시20분 포탄껍질을 잘라 만든 종이 기상을 알리면 전 식구가 모여 조회를 하고, 각자 맡은 지역 청소를 하면 6시10분부터 아침식사가 시작된다.   학교가 먼 중고생부터 먼저 식사가 되고 다음에 국교생들이 식사한다.
아이들은 모두 18세 미만으로 7세이하가 2명, 8세~10세 15명, 11세~15세 18명, 15세 이상 4명으로 국민학생 24명, 중학생 8명, 고등학생 5명(남자21명, 여자17명)이다.   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나면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2명의 어린이만이 숲속을 뛰어다니며 논다.
학교를 가기 위하여 어린 국민학생들도 3km를 도보로 나가 5km는 차를 타고 송추국민학교로, 중고생은 12km나 떨어진 의정부로 학교를 간다.   겨울이면 어린학생들은 눈길에 넘어지고 추워서 엉엉 울고 돌아오지만 아침이면 다시 학교에 결석을 하지 않고 간다.   어쩌다 중고생 언니들이 무슨 일이 있어 늦는 날이면 횃불을 들고 버스가 닿는 신흥유원지까지 나가 기다린다고 한다.
이들은 부모와 이웃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아침 조회 때 맏형의 구령에 따라 체조를 하고 학교 가기 전에 사무실 앞에 모여 인사를 한 다음 맏형이 나누어주는 그날의 버스권을 받아 쥐고 책가방 속에 도시락을 모두 하나씩 넣고 열을 지어 학교로 간다.   학교가 멀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짜리도 도시락을 들고 가야 한다.
한국보육원이 이 진달래 동산으로 이주하기는 창설 20주년을 맞은 1970년 5월이다.
원아 제주 공수작전 영화
한국보육원은 6.25사변이 일어난 1950년 10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서울시가 종로국교에 모아서 UN의 지원을 받아 민간보육원으로 설립했다.
그러나 이해 12월 중공군의 남침으로 어린이 8백47명과 직원 1백여명등 1천여명이 제주도로 공수되어 제주농고에 이주했다.
이 공수작전은 주한 미 제5공군의 고문헤스대령과 패트리지장군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전쟁고아들의 공수를 위해 전쟁중에 군수송기 10대가 일본에서 발주하는 등 전쟁속에 핀 인간애의 극치였다.
이 이야기는 당시의 공수를 주선한 헤스대령이 수기Battle Hymn를 써서 세계 각국에 널리 읽혀 주었고 마침내 전송가란 제목으로 영화화(록허드슨, 안나카슈리 주연)되어 국내에서도 상영이 되었다.   이 영화 촬영을 위해 한국보육원생 40여명이 미국에 건너갔으며 원장 황정신행 법사와 원아들의 TV대담 프로가 생방송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1955년 11월 이문동 임시숙소로 이주한 한국보육원은 크리스마스날 새벽 뜻밖의 화재를 당해 이날 휘경동 2만4천여평(현 휘경여중고)에 건설중인 새 보금자리로 앞당겨 이주했다.
새벽에 당한 일이라 옷 한 벌 꺼내지 못한 채 미군 부대에서 준 옷을 오바처럼 걸치거나 엉덩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완공되지 않는 집으로 추위를 피해 들어갔다.
그러나 큰 시련을 당한 한국보육원은 좌절하지 않고 새 희망으로 보금자리를 가꾸었다.
당시 지었던 건물들이 현재도 휘경여중고의 특별교실 등으로 6동이나 사용되고 있다.   장독대와 김칫독 창고는 강당으로 수리하였고, 원아들의 1인1기 습득을 위해 세운 직업훈련학교 8개 교실(1부 3층)은 휘경여중 개교의 산실이 되었다.
특히 제주도에서 80여명으로 창단(52년)된 브랏시 밴드는 국내대회에서 수상뿐 아니라 국가행사의 취주악 연주, 어린이 사절단으로 홍콩총독의 초청을 받아 홍콩어린이공원개원 초청연주(56년), 미8군의 초청연주 등 활동이 대단했다.   이 밴드부는 1963년 광신중고교에 모두 장학생으로 편입되었다.
한국보육원이 국내외의 많은 관심이었던 것은 현재 원아들의 식당 한 벽을 다 메꾸고 있는 대형사진들이 증명을 하고 있다.
텍사스주민들이 원아들의 복지를 위해 젖소를 보내주었고 이승만  박순천  정일영  이방자  이태영  백선엽 등 국내인사와 밴프린트미8군사령관, 덱커UN사령관 등 당시 한국을 움직이는 정치인과 유명인사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사회사업가 황정신행법사
한국보육원하면 황정신행 법사(황온순 80세)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황법사가 한국보육원을 맡은 것은 1951년 1월이었다.
황법사는 1950년 4월 UN장학금을 받아 영국으로 아동보호사업을 공부하러 갔다가 외국에서 6.25사변의 조국참상을 들어야 했다.   폐허된 건물과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아이들을 보고 11월에 귀국하여 한국보육원을 맡은 것이다.
전쟁중에 하나뿐인 아들(강필국)을 잃은 황법사는 원아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더욱 넓게 폈다.  
황법사는 황해도 연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부친이 부모없는 거지 아이에게 사랑베푸는 것을 보고 다음에 고아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이화학당  경기여전을 나와 하얼빈에서 유치원 보모를 시작으로 동대문 부인병원 부속건물에 유치원 학원(탁아소)을 설립하여 10년간 운영도 했다.   여기서 퇴직하면서 받은 9백원으로 지금의 진달래동산 땅을 산 것이다.
결국 호아법사의 80평생은 어린이들을 위한 사회복지사업 분야에서 일한 일생이었다.
황법사는 사회사업은 물질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특히 아동 보육사업은 물질의 투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지도까지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육사업은 운영역량과 지도역량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 한마디 말과 생신날이면 한국보육원 출신 2백여명의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모인다니 황법사가 사회사업 공로로 1967년 5.16민족상을 수상한 것이 한국보육원 하나 운영한 것만의 공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황법사가 원불교에 입교한 것은 원기20년(1935년)이다.   당시 기독교를 신앙하던 황법사는 편협한 신앙과 의식에 회의를 갖고 금강산을 여행하던 중 옆 사람의 권유로 대종사님을 뵈옵고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법문을 받든 후 발심하였다고 했다.   이후 교단초창의 어려운 일에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여 현재 교단의 수위단원으로서 대호법이며 창필재단 한국보육원의 이사장 겸 보육원장이다.   또한 사회적 직책은 휘경학원 이사장으로 80세의 노구인데도 지칠 줄 모르고 일한다.
교단의 모습 보일 새 도량
한국보육원은 1953년 7월 보사부로부터 재단법인 인가를 받고 54년에는 기독교 아동복리회(CCF)에 가입하여 가맹단체로 활동하여 왔다.
그러나 70년 휘경동 한국보육원 자리에 휘경여중이 세워지면서 현재의 진달래 동산으로 이주하게 되자 여러 가지 운영에 문제가 일어나 1977년 대한 사회복지회에 위탁운영을 하였다.
그러나 대한사회복지회는 한국보육원을 변칙운영하여 설립취지와 다른 방향으로 나가자 황법사는 금년 2월23일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을 설립하여 한국보육원을 교단에 인수하게 되었다.
교단에서는 3월24일 대한사회복지회로부터 인계를 받고 김정문(부원장) 정윤재(부원장) 한지연(교무) 김도운(교무) 교역자 4명을 발령하였다.
창필재단은 웅지의 뜻을 펴지 못한 채 아직 젊은 나이로 6.25사변에 희생된 묵산 박창기 선진과 강필국씨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만2천여평의 진달래 동산과 한국보육원으로 설립된 사회복지법인이다.
과거 한국보육원에 교역자가 파견 발령되어 원아들을 돌보며 봉사했던 일이 있으나 지금의 상황과는 달라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보육원은 4명의 교역자가 봉직하는 교단의 한 자선기관으로서뿐 아니라 수도 서울을 중심한 교단 사회사업의 얼굴이 될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그러므로 교단의 목표인 교화  교육  자선 중 미약한 자선사업이 한국보육원을 통해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며 30여년의 찬란한 전통으로 키워온 황정신행 법사의 뜻이 살아날 수 있는 제2의 황정신행 법사가 기다려진다.
또한 진달래 동산의 1만2천평은 서울근교의 명승지로서 청소년 뿐 아니라 성인들의 훈련장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서울교구단의 관심보다 교단적 차원에서 관심갖고 개발하여 수도 서울에 교단의 모습이 실질적으로 보여 질 수 있는 훈련장으로 기대된다.
대산종법사께서 종법사에 취임 하시기 전 이곳에서 정양을 하실 때 심었다는 다래넝쿨이 참나무를 휘어감고 늘어진 밑으로 빠져나오는데 주변정리하는 페이보다 엔징소리가 우렁차다.
<박달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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