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아영교당에서 3년
청년들과 농촌활동에 적극 참여
4H면 연합 본부를 교당으로 유치
“옷 없어 교당 못 온다”는 말 듣고 삼베로 바꿔 입어
뽕나무 심고 야학도

그런대로 안정된 교화의 틀이 잡혀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심어놓은 뽕나무가 자라면 나는 누에를 키워 봄 가을 수입을 올리고 찌그러진 토담집을 훌륭한 법당으로 신축할 꿈도 꾸었다.
두만면 지서에서는 어느 날 신도안에 산재해 잇는 각 종교의 대표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종교자료를 비치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못난 내 모습을 원불교 대표라고 하기가 안 되어 백운선씨 사진을 대신 보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자리가 잡히지 않았을 때의 일들이라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밖에 없다.
이런 곤궁한 신도교당이었지만 교단 중진 어른님들 거의가 다녀가셨다. 편찮으셨던 정산 종사님과 육타원님께서만 오시지 않았다. 대산 현 종법사님께서는 법위에 오르시기 전 오셔서 머무셨다. 먹을 것이 없어 보리밥에 감자를 넣어 식사를 해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먹고 입는 것 모두가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궁색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더욱 사명감을 굳혀졌다. 야학을 통해 청소년 교화를 활기 있게 하였다. 지금 전무출신 하여 교당교무로 나간 분도 있어 그때의 보람을 느껴본다.
그러던 어느 날 총부에서 공문이 한 장 날아왔다. 그때만 해도 전화가 없었고 뿐만 아니라 편지도 자주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통신이 별로 없던 때라 나는 궁금했다.
공문 내용은 다름 아닌 인사이동에 관한 것이었다. 신도교당에 동산 이병은 선생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현 종법사님께서 자주 내왕을 하시던 때라 재가 ㆍ 출가교도들도 많이 드나들게 되었다.
내가 부임했을 때만해도 아무런 왕래가 없었다. 다만 산골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존폐의 위기에 놓였던 교당일 뿐이었는데 종법사님의 행가에 따랄 분위기는 달라졌다.
공문을 받고난 나는 솔직히 화가 났다. 어렵고 답답했을 때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 가지 여건이 달라지니까 서로 오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구태여 나의 복잡했던 지난날을 꼬집어 생색을 내려는 것도, 미련이 있어 떠나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지만 그때의 심경을 그대로 말해본 것이다.
사람은 항상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배우고 그래서 과거의 잘못을 반성 또는 후회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젊어서 그런 상대적인 생각을 일어냈던 것. 절대적인 그 자리에 합일하고 보면 시비마저 끊어져 무엇을 더 왈가왈부 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나의 인사가 뜨게 되자 이광정 교무는 내게 아영교당을 살기 좋은 곳이라고 권해왔다. 교역자에게 어디인들 살지 못할 고이야 있겠는가마는 아마도 내 인연지여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때까지도 정식으로 전무출신 서원서를 서류로 제출하지 않고 있었다. 현재처럼 입학하면서 지원서를 내야하고, 졸업과 동시에 서원서를 제출하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렇듯 늑장을 부렸다.
나는 솔질하게 수화라도 불피 한다는데 자신이 서지 않아서 내 손으로 날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전종철 교무가 독촉을 하여 서류를 갖추도록 일임하게 되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도 아니었고 어떤 사심 잡념으로 인한 갈등에서도 아니었다. 일원의 진리를 서양하는 교역자로서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사명을 다하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을 한 점 망설임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다.
나는 나름대로 개성이 강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하니까나도 해야 한다든지 그 물결에 뒤지지 않으려는 생각도 일어내 본 일이 없다. 내 신념대로 옳은 일이라면 하고 내 힘이 닿으면 정성껏 임하고 불의라 하면 어떤 경우에라도 행하지 않으리라는 생활방식으로 살아왔다. 물론 관점의 차이는 있어 혹 그르치는 일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잘못인 줄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행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 고집부리고 있을 수도 없고 화는 났지만 동산 선생님께 인계를 하였다. 처음 남선리에서 살았던 집을 판 돈과 논 두마지기 반 팔은 서른다섯 가마니의 쌀을 인계하였다. 뽕나무 밭은  그대로 둔 채.
상록수의 진실
산골에서 다시 산골로 나는 석장을 옮겼다. 계룡산 골짜기의 공기도 좋았지만 지리산 자락으로 자리한 아영의 풋풋한 인정도 이에 못지않게 정겨웠다.
원기 47년 4월이었다. 농촌의 일손이 바빠지려는 봄철 또 다른 상황아래서 나는 교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영교당은 원기 38년 이웃교당인 운봉에서 출장법회를 보아오다가 교당을 세운 곳이다. 말씨부터가 충청도 신도안과는 다른 이곳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찌들리는 농촌살림에 보탬이 되어 줄 수 있을까가 크게 걱정이 되었다.
종교적 신앙과 수행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식주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는 잘 살고 싶은 문제가 가장 절박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한창 붐을 이루었던 4H클럽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아영면 연합회 본부를 교당에 설치하였다. 새마을 운동을 벌이듯이 농촌지도소에서 적극 권장했던 사업이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의 참여가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밤으로 야학을 개설하였고 야학에 나오는 청년들과 함께 4H 클럽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4H클럽은 미국의 농업보급 사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S ㆍ A 내프(1833~1911)가 시작한 청소년의 농사연구 클럽을 모체로 하여 탄생되었다. 그래서 농업구조의 개선과 농촌생활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농촌 청소년의 학습단체라고 말할 수 있다. 4H란 두뇌(Head), 손(Hand), 마음(Heart), 건강(Health)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고학적인 머리(智育), 성실한 마음(德育), 일하는 손(技育), 훌륭한 건강(體育)을 지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47년부터 농림부 관리 아래 농촌의 부락과 학교를 단위로 하여 조직이 시작되어 농촌의 각종 기술 ㆍ 경영 ㆍ 생활개선의 연구와 실천에 정열을 쏟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건전한 이념에 부응하고 따라서 교화의 활성화를 위해 본부를 교당으로 했고, 여자 청년들을 동원하여 수예품과 옷 등을 만들어 출품도 하였다. 땀 흘리는 농부들의 애로와 보람을 배우게 되었고 가장 인간의 밑바닥에 흐르는 애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입교한 교도들이 잘 대해주면서도 교당에는 나오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몰라 「왜 안 나오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대부분이「옷이 없어서 교당에 나갈 수가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비로소 궁핍한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상록수의 진실을 새삼스럽게 다짐하게 되었다.
살아가는 고충이 갖가지였다. 나는 그때부터 부드러운 옷만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베로 적삼과 치마를 해 입고 그리고 그들과 같이 밭일을 하였다. 동고동락이라는 것이 형식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용만으로 다되는 것은 아니었다.
<법사 ㆍ 이리 남중교당>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