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아영교당에서 3년
거의 매일 10리 길 걸어 다니며 순교
면 유지들로 친목계 조직, 교화 터로
백지명 교무 도움으로 도서실 열고 야학도 개설
삶의 순수 느껴

검은 물도 들이지 않은 노란색 삼베치마와 적삼을 입고 밭에서 일하는 교도님을 찾아 밭도 같이 메고 뜨거운 태양아래 그들과 함께 하루해를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인생과 삶의 철저한 그리고 순수한 본능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나는 출가 이전의 생활에서는 가난으로 찌들린 생활을 몰랐다. 특별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이 몰고 온 고뇌는 체험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신도안에서의 철저한 경험, 이 경험을 바탕 하여 이곳 아영에서는 늠름하게 대처할 힘이 생겼고, 그들의 애환을 달래 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나는 마을 청소년들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운 생각을 하였다. 시골아이들이라 학교를 다니다 해도 집에 돌아오면 소몰이로부터 풀베기, 논밭에 나가 어른들 일 돕느라고 어느 사이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읽을 시간이 있어도 읽을 책이 없는 아이들, 그나마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집에 묻혀 버리는 아이들이 못내 안 되어 나는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어주고 싶어 야학을 적극적으로 운영하였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한문도 가르쳤고,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주판을 가르쳤다. 이 주판 교사는 그곳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는 상고출신 남자 직원을 초빙하여 가르쳤다. 밤마다 교사도 학생도 모두 신바람이 나서 수업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전설 같은 시절이었다.
때때로 겨울이면 나는 청년들과 함께 지리산에 올라 나무를 하였다. 실상사 앞에까지 가서 하는 때도 있었다. 반찬 없는 점심을 먹어도 어느 진수성찬 못지않게 그렇게도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노동의 대가가 그런 맛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농번기나 농한기나 나는 틈만 나면 순교를 하였다. 거의 하루도 순교하지 않은 날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골길, 돌멩이의 세례를 받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2km 되는 교도님 댁은 아주 가까운 거리. 보톤 3km~4km를 걸어서 방문하여 일원의 진리 소식을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
쉬지 않는 발걸음, 신발이 견디지를 못했다. 그러나 나는 구두를 맞추어 신어볼 일이 없었다. 운동화나 고무신, 아니면 싸구려 기성화로 그렇게 순교하였다. 그래서 아영면 일대 어느 골목 누비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법회 출석은 대개 60~70명 선에 이르렀다. 허술한 법당은 비만 오면 여기저기 빗방울이 세는데 그것을 수리하였다.
좀 더 폭넓은 교화를 위해 나는 친목계를 조직하였다. 주로 아영면 우지에 해당하는 분들로 조직하여 한 달에 한 번 씩 교당에 모여 점심 대접을 하면서 친목을 도모했다. 말하자면 교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이런 모임을 가졌다. 이 날의 점심에 대해서는 점심값을 받았었다.
도서실을 운영
어느 해 여름방학 때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백지명 교무가 찾아왔다. 지명교무에 대해서는 내가 새삼스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이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어 교단의 어른님들을 비롯하여 후배들까지 가슴아파하는 인재였다.
그때 지명교무는 원대 약대교수로 재직하였다. 언제나 농촌을 동경한터라 방학 중에 이 아영 골짜기를 찾아 왔던 것이다. 그리고 야학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책상도 없이 마룻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는 것을 보고는 내게「책상을 마련해 드릴까요?」하는 것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희미한 남포불빛으로 배워 보겠다고 모여든 아이들. 나는 지명교무의 고마운 마음에 책상 보다는 도서를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책이 귀해 동화 한권 읽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원했다. 한권이라도 읽게 하려고.
지명교무는 1개월 이곳에서 머물다가 돌아가서 바로 3백 권이나 우송해 주었다. 나는 너무 고맙고 반가워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세상은 각박하지만은 않았다. 큰 한 뜻이 멀리에만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책장에만 놓고 볼 수가 없어 도서관처럼 책장을 짜서 열쇠를 가지고 대출 식으로 관리를 하였다. 책값을 받고 빌려주고 가져오면 책과 돈을 교환해 주었다.
돌이켜볼수록 고맙고, 생각할수록 아까운 지명교무다. 청초한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짧은 서른일곱의 생애였지만, 그의 평소 신념대로 짧고 굵고 뜨겁게 살다가 갔다.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그는 늘 겸손했고 무엇인가 봉사하며 살려고 무척 노력했던 교역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백합처럼 순결했고 강인한 의지로 마음의 조각사 되어 부처 이루려는 부단한 정진을 하였다. 지명교무는 그때 내가 입은 삼베치마를 보고 이것을 소재로 시 한편을 내놓기도 하였다. 약학도였고 그러면서 아마추어 문학도였었다.
나는 어느 날 청년들과 함께 실상사 암자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 점심때가 되어 우리가 그곳 스님에게 식사를 권해 같이 먹었고, 오락시간에는 노래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한 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고, 유쾌한 장단이 흘렀다. 내게 그 스님은 노래를 시켰다. 나는 노래 제목도 모른다 했더니 그 스님은 「무너진 사랑탑」이라 말하는 것이다. 폭소를 터트리고 한 동안의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래 12월 25일 이름도 모르는 실상사 암자 스님이 카드를 보내왔다. 아무래도 괴짜중이라고 밖에 더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당신도 보내지 않았음은 물론인데 그 스님은 무조건 그로부터 오랫동안 매년 카드를 보내곤 하였다. 내가 군남교당 교무로 갔을 때까지도 보냈다. 그리고는 어느해 부터는 소식도 없이 끊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였다. 얽히고 얽힌 삶의 현장에서 부상되는 촌극들이었다. 무엇을 어쩌겠다는 계획도 목표도 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들 속에 간직된 줄거리이다.
나는 허술한 법당을 건축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절약 절식의 생활을 하였다. 양식을 아껴 기급에 보태려고 겨울이면 점심을 굶고 하루 두 끼로 때웠다. 나는 그래도 견딜 수 있다고 하지만 함께 살았던 선주씨(감원)는 무슨 수로 이를 감내했는지 모른다. 고락은 함께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 드는 일인지 모른다. 교역자의 사명으로 하는 나를 따라 함께 생활의 리듬을 맞추어 주었던 선주씨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는 추수기가 다가오면 논에 나가 여물어 가려는 나락을 가먹는 새를 쫓는 일도 했다. 지금처럼 그물망도 없어서 막대기로 휘저으며 소리를 질러 날아드는 새를 저 멀리 쫓는 일도 했던 것이다.
<법사 ㆍ 이리 남중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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