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광 군남교당에서의 6년
법당 비좁아 일부교도는 겨울에도 창밖에서 법회
어려운 상황 불구, 교당 신축 추진해
창업하는 보람으로 역경을 극복
어려운 인사이동

산골 아영에서 어느덧 3년을 살게 되었다. 특별한 교화실적은 없었지만 순박한 시골인심 속에 그래도 보람을 느끼면서 간이 독서실까지 운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총부로부터 소식이 왔다. 총무부장님(당시 다산 법사님)께서 다녀가라는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인가 궁금도 했지만 꾹 참고 총부에 오게 되었다.
『김인석 교무가 가려고 하니 나오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시작된 내 인사문제는 다소 시끄럽게 되었다. 교역자가 어느 근무지인들 착심을 두겠는가? 나는 공명을 따라 옮기려 교도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후임 인석교무님과 인수인계도 마쳤다.
그러나 사건은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었다. 송별기념사진을 찍자고 나를 오라고 하여 교도님들께 갔더니, 교도님들은 바로 그곳에 나를 감금시켰다. 그리고는 송별연으로 마련된 떡 바구니를 인석교무에게 주면서 돌아가라는 것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촌극을 빚는 와중에 휩쓸리게 되었고, 신임교무로 부임 차 왔던 인석교무는 내가 가지고 가야할 떡 바구니만을 들고 총부로 가게 되었다.
그때 교도부회장은 일을 이렇게까지 벌여 놓고 총부에다가는 인석교무가 간다고 전보를 쳤다고 한다. 나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총무부에서는 당시 과장으로 근무했던 이형원 교무가 교도들에게 전화를 하였다.
『교도님들 생각이 그렇다면 좋습니다. 심교무님도 총부 명을 따르지 않으니 앞으로는 아영교당 교무는 발령 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7일 동안의 데모(?)는 끝이 났고 나는 다음 근무지인 군남으로 오게 되었다. 그대가 원기 50년 4월이었다.
막상 이 교당을 떠나려 하니까 갖가지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살을 아껴 법당을 지어보겠다고 무밥을 해먹기도 했었다. 신도안에서는 고생이 더욱 막심했었다. 지금 생활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사회도 국가도 어려웠지만 유난히 취약성을 면치 못했던 신도교당이었다. 그래서 나와 선주씨는 쑥으로 밥을 지어 먹기 시작하였다. 쌀이라고는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넣었다. 쑥밥을 먹기 7일 되었을 때 선주씨는 속이 쓰려 못 먹겠다고 야단이었다. 나는 그래도 꾹 참고 먹어보자고 하여 15일 동안을 계속해서 먹었더니 더는 못 견디도록 속이 쓰리고 아파 건강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교단 창업의 역사에서 전무출신들은 고생을 낙으로 삼았다. 거기에 보람과 긍지를 가지며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찾았고, 선두 주자된 기쁨을 간직했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오늘 현재의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는 무한히 값진 세월이었고 면면히 전수되어야 할 정신의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좀 더 어렵게 좀 더 고통스럽게 하나하나를 이루어내야겠다는 의지를 가꿔야겠다.
시급한 신축문제
군남교당은 영광읍 군남면 포천리에 소재해 있다. 원기 41년 11월 도양교당을 연원으로 하여 창설된 교당이다.
어느 교당이든 우리의 정법이 자리하게 되어 간판을 부치고 교화가 시작되면 발전이 속도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세월이 갈수록 드러나기 마련이다. 군남교당 역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당이다.
내가 이곳에서 교화 주재자로 6년 머무는 동안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잇다.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해진 일들도 있지만 아직은 생생히 남아있다.
서서히 교도들이 불어나 법당의 협소함은 당장 다급한 과제가 되었다. 겨울에는 창문을 닫지 못하고 창문을 떼어놓고 마당에서 법당안의 설교를 들어야했다. 특별한 말솜씨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 자기 인생의 보감을 삼겠다는 한 생각이 추위를 무릅쓰고 2시간 동안을 서서 법회를 보게 했던 것이다.
나는 교당 신축을 목표로 정성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동안 교당 논 두마지기를 팔아서 받은 쌀 20가마니를 빚을 놓아 가을이면 이자로 9가마니를 받고 있었다. 나는 이 삯 9가마니를 일체 관여하지 않기로 하고 교도들에게 알아서 길러 교당 지을 기금 마련하라고 일임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나름대로 신축공사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방안을 연구하였다. 부임한 지 3~4년이 지나면서 그런대로 군남면 인심을 파악하게 되었고 김천익 회장을 만남으로 해서 서서히 공사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익씨와의 인연관계가 돈독하기 이전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분이 나서지 않고는 안 되겠다 싶어 오며 가며 천익씨 집을 들리게 되었다. 『선생님 집 잘 지으신다면서요? 한번 설계해 보세요.』
이렇게 해서 교당신축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드디어는 적극적인 참여로 큰 공로를 쌓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 교도들 일부에서는 야단이 났다. 기금으로 있는 쌀을 가지고 이자를 받아 모아서 몇 년이 걸리는 그것으로 신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관계없이 성금을 받으려 방명록을 만들어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교도들과 마찰이 생긴 것이다.
말하자면 이소성대의 원칙도 모르는 교무이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누구 위해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일을 해야 할까? 그렇지만 여기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당장 법회 보기가 비좁아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밖에서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계도는 나왔고 권선장에는 소요와는 상관없이 쌀 1백50여가마니가 적혀지게 되었다. 이 권선은 정말 희사할 마음으로 적으신 분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설마 공사가 되어 질까 하는 의문심으로 그냥 적어 놓고 보자는 그런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공사가 착공될 때 1백50여가마니 중 쌀 70가마니 밖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첫 희사에서 천익씨는 30가마니를 내 놓았던 것이다. 신근이 약한 사람들은 돈을 내라고 할까봐 겁을 먹고 아예 교당에 나오지도 않았다.
이때 천익씨는 벽돌을 찍고 그 위에 물을 주는 등 교도들의 공동출역이 제대로 안되자 부인과 함께 가족을 동원해서 이 일을 맡았다. 기둥이 세워지고 벽이 세워졌다. 그런데 자금난으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건축을 중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내말을 들은 천익씨는 바로 뛰어 나가더니 본인 이름으로 차용증을 써주고 나락 1백석을 빚내왔던 것이다. 중단할 고비에 공사를 진행시킨 그 은혜 잊을 수가 없다.
<법사 ㆍ 이리 남중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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