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人精神 再次興起」의 생애
義氣 드높은 大人의 인품으로
「영육쌍전」의 산 표본 나툰 선진

사진>필자(앞열 우측 첫 번째)가 일본 대판교당 교무 재직시 원기 63년 11월경 일차 귀국하여 교화현황보고를 마치고 대산종법사, 형산 종사(앞열 우측 두 번째), 숭산종사 등을 모시고 종법실 앞에서 기념촬영.
 형산 김홍철 종사님! 「구인정신 재차흥기」로 교단 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스승님께서 열반에 드신지도 어느 듯 1년이 지나 일주기를 맞이하오니 지난 겨울의 가슴 북받친 슬픔이 또 다시 저며옵니다. 의기와 인정이 넘치는 성안을 다시 뵈옵길 없는 아픔을 간직한 채 스승님의 지난 일생의 행적과 끼쳐주셨던 유훈들을 추모해 봅니다.
 형산 종사님께서는 1902년 영산 성지에서 구인선진 중 한 분이신 팔산 김광선 대봉도님 출가이후 장남으로서 가사를 책임져야 할 처지였으나 원기 15년 30세시 一刀兩斷의 큰 결심과 서원으로 출가하신 후 총부 농업부감원, 신흥교당 교무, 총부 서무부장, 영산 지부서무부장, 이흥과원 주무 및 이사, 총부 순교감, 영산재방언공사 부위원장, 원광사 사장, 총부 예감, 교령 및 수위단원을 역임하시는 등 50여성상을 안 난폭 잡고 滅私奉公하신 거룩한 생애를 삶으셨습니다.
 소제 자는 열일곱 어린 나이로 이흥과원에 근무하며 스승님의 품안에서 출가의 서원을 키웠으며 그 후 한결같은 사랑으로 길어주시고 깨우쳐 주신 대은과 지중한 인연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만 생전에 불효함을 참회하며 추모의 글을 올립니다.
 형산 스승님은 구인선진께서 초기교단을 平地造山格으로 창립하실 때 몸으로 직접 체현하셨던 창립정신을 오롯히 계승하신 어른이셨습니다. 대종사님과 구인선진께서 저축조합운동 방언공사 혈인 기도를 하시는 것을 직접 目睹하며 잔심부름을 하셨던 형산 스승님은 대산 종법사께서 영전에서 설법하신 대로 「구인성신을 재차흥기」하신 사표적 인물이셨습니다.
 창립정신 가운데 이소성대의 정신을 체 받은 형산 스승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새 집무를 맡으시고 1, 2년이면 없던 살림을 일으키셨으며 광에는 쌀이 불어나고 마당에는 나무가 쌓였습니다. 특히 신흥교당 교무로 재직하신 9년 동안은 「잘사는 마을ㆍ부지런한 마을ㆍ근면 절약하는 마을ㆍ화목 단결하는 마을ㆍ상부상조하는 마을」이란 가치아래 주민들을 계몽,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었으며 농촌진흥운동우수마을로 뽑혀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하셨지요.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무리하게 큰돈을 들여 새로 교당을 신축하는 일은 엄두를 못 내시고 改修 하시는 데에 그치시곤 하셨지요. 이소성대의 정신으로.
 또한 형산 스승님은 무서운 공심가로서 위법망구 위공망사의 삶으로 일관하신 어른이셨습니다. 혈기왕성한 청장년 시절 결혼을 하고도 3년 간 사가에 가지 아니하고 대종사님을 모시고  익산 총부 건설에 정진하셨다는 스승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소제자 역시 결혼 후 3개월 간 사가에 왕래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형산 스승님의 교단을 향한 공심과 혈성은 영산 재방언 공사를 책임져 이행하시면서 절정을 이루셨다고 생각됩니다. 정산종사께서 「사무여한」4글자를 써주시면서 특명을 내리시자 두말없이 영산으로 가시어 온갖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며 정산종사님의 훈증과 동지들의 합력 속에 원기 44년에 재방언 공사를 완공하셨지요.
 형산 종사님께서 9인 선진님들의 정신을 체받아 나투어주신 창립정신의 특징은 근로정신이라고 본다. 형산 스승님은 이론 보다 행동이 늘 선행되는 분으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대표적 인물이셨다. 직접 능숙한 솜씨와 건장한 기력으로 지게질 쟁기질 삽질 낫질 등 농사일에 앞장서서 후진들의 근로정신을 일깨워 주셨다.
 형산 종사님께서 이흥과원을 책임지고 계실 때에 김장권(故人)ㆍ이선우 교무와 필자 등 청년들은 스승님의 사랑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었다. 영광 장과 포천장에 과일을 잔뜩 짊어지고 팔러 가곤 하였다. 비탈길을 오를 때면 동행하시던 형산 스승님께서 뒤에서 밀어주시며 격려해 주셨고, 밤이면 공사를 마치고 「초발심자경문」「명심보감」「철자집」「논어」「중요」등 한문공부를 가르쳐 주셨다. 이러한 근로정신과 주경야독의 생활은 총부 산업부로 수계농원 만덕산 농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형산 종사님은 권위와 위신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궂은 일 어려운 일일수록 후진들에게 떠맡기시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맡아 처리하시는 분이셨다. 개똥이나 소똥이 있지 아니할 곳에 있는 것을 보시면 밑에 사람을 부르시지 않고 직접 삽으로 처리하시는 그런 어른이셨다.
 형산 종사님은 정의감이 뛰어난 어른으로 대의와 명분에 따라 의롭게 사신 대인이셨다. 수위단회를 비롯 크고 작은 회의석상에서 옳은 일이면 당신의 뜻을 격렬히 주장하셨으나 공의로 결정된 일에는 빌고 당신의 뜻과 어긋난다 하더라도 두말없이 따르는 그런 분이셨다. 한 기관의 책임을 맡아 일하다 보면 자칫 그 기관 일에 국집 되어 전체를 살피지 못하는 수가 있는데 형산 종사님은 늘 책임 맡은 기관보다도 총부 걱정을 먼저 하는 그런 어른이셨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이 회상 창립에 동참했던 형산 종사님은 원불교를 위해 일하셨으며 원불교에 대한 생각과 말씀만으로 전 생애를 일관하셨던 어른이셨다.
 형산 종사님은 대종사님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한 정통정맥의 제자로서 후진들이 존경하는 스승 가운데 한 분이셨다. 대종사님을 모시던 그 마음 그대로 정산 종사님을 받들었고 정산종사님을 받들었던 그 마음 그대로 대산 종법사님을 곁에서 보필해 드렸다. 정산 종사님은 두살 위인형인 관계라 하지만 12살 아래인 대산 종법사를 두마음 없이 온통 바쳐 보필한다는 것은 범인으로는 용이하지 않는 일 일 것이다.
 형산 종사님은 일생을 통해 公議와 종명에 따라 심신을 온통 바친 어른이셨다. 제자들을 지도하실 때에도 늘 「당신사람」만들지 않고 위 스승님께 인연을 걸어 주셨고 정통법맥을 바로 세우며 떳떳한 길로 인도하셨다.
 또한 형산 종사님은 知己之友의 우정을 지닌 행복한 분이셨다. 좋은 때 친구이면 어려울 때도 친구이어야 하는 것인데 좋지 않을 경우 갈라지게 되는 것은 참다운 친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수십년 사심 없이 통해 오던 동지들도 어쩌다 어려운 큰 경계를 당하면 서먹서먹해 질 수도 있는 법인데 형산 종사님과 성산 성정철 종사님 두 분의 일생을 돌아보면 변함 없는 의형제로 일관했음을 알 수 있다.
 형산종님께서 40대 후반에 10년 간 근무하셨던 이흥과원은 총부 직속기관으로 운영되는 기관으로 총부 대중들의 식량과 연료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당시 총부 재무부장이셨던 성산 종사께서 늦은 가을이 되면 이흥과원을 오시었다. 그때 그리도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시고 웃음꽃을 피우셨던 것을 기억한다. 「그 무엇이 아쉬워서 또 찾아 왔느냐」고 농담하시던 형산 종사께서 총부로 돌아가시는 성산 종사님께 무엇 하나라도 더 주어 보내시려고 애쓰시던 모습들이 마냥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었다.
 고락을 함께 나누고 이해를 초월,  생사까지도 동반할 수 있는 그런 知己之友이셨다.
 형산 종사님은 속 깊은 인정으로 제자들을 바르게 교화하신 스승이셨다. 직계 자녀 손과 안이정ㆍ김근수ㆍ김장권ㆍ이선우ㆍ이선경ㆍ김성현 교무와 필자를 비롯, 30여명이 형산 종사님의 인연으로 전무출신하여 교단에 봉직하고 있다.
 형산 종사님 밑에서 전무출신을 시작했던 임원들은 교단 그 어느 곳에서의 근무보다도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머슴생활과 다름이 없는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당신이 직접 일터로 나서셔서 몸으로 실천하며 앞장서시는 터라 임원들은 한마디 불평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보통 세속 머슴살이와 다른 점은 일요일 법회와 아침 좌선 그리고 저녁에 하는 한문공부였다. 그러나 그러한 힘겨운 노동 속에서도 순응하며 즐거이 주경야독의 생활로 전무출신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은 형산 종사님의 일호의 사 없는 공심과 친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구분을 느낄 수 없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형산 종사께서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처리하므로 속 모른 사람이 볼 때에는 냉정한 사람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영산이 6ㆍ25 와중에서 시끄럽고 위험해졌을 때 길용 리에 있던 가족들이 이흥과원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나 한끼의 밥일지라도 공것으로 먹여주지 않는 형산 종사의 성품을 아는 가족들은 시집가서 사는 형산 종사의 여동생(김용선화씨) 집에서 식사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엄격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자녀 손들이 대대로 전무출신을 하고 있으니 실로 불연 깊은 집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형산 종사께서 대종사님과 구인 선진님들이 체현해 주셨던 창립정신을 거듭 흥기해 주신만큼 교단을 아끼고 책임지는 혈심혈성 사무여한의 창립정신이 길이 계승되어야 하겠다. 「시대에 적응한다고 창립정신을 흐리게 하는 일을 능사로 안 다든지 자기주견에 고집하면서 대종사님 정신이거니 한다든지 자기 욕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대종사님 정신을 모호하게 하는 일들이 만에 일이라도 없는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고 부촉 하신 형산  종사님의 유훈을 음미하며 「몸으로 堰을 막던 팔산 어른 혈통이어 사무친 공심으로 재방언을 이루셨네 의기로 다진 일생 회상에 正氣심어 그 信義億萬古 큰 거울로 빛나시네」란 조가를 조용히 불러본다.

<원광보건전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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