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흡 스님과 인연
제출했던 정전출판허가서 반려되고

나는 특별하신 대종사님의 배려로 전무출신을 하게 되었다. 복잡한 사가일을 염려하신 대종사님께서는 정안심행 선생으로 하여금 가정일을 조력하라고 할테니 안심하고 공사에 임하라는 말씀이 계셨고 따라서 그 당시 누구나 총부에서 합숙으로 생활기반을 삼았었는데 나는 집을 내왕하며 공무를 보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내 생활이 오늘날 전무출신들의 출퇴근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여 자책감마저 들기도 한다. 아무리 그때의 사정 때문에 공인을 얻어서 그랬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천만다행으로 이회상의 창립기에 대종사님 같은 어른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그 뜻을 만분의 일이라도 받을 수 있었음은 내 생애를 통해 영광된 세월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힘 미치는데로 여러 가지 면에서 의견도 말씀드렸고 시키시는 일을 수행해 나가게 되었다.
경진년 동선 그러니까 원기 26년 1월에 나는 불공에 대한 표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게 되었다. 그동안 무시선 무처선은 나와 있었다. 대종사님은 이에 대해 선원대중 모두에게 표어를 만들어 보라고 과제를 주셨다. 대종사님께서는 이미 심중에 구상이 다 되어 계시면서도 우리들의 능력과 역량을 개발시키고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마의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문제를 던져 주셨던 것이다.
대종사님은 작은 일에서 큰일에 이르기까지 제도나 규율과 교리형성에 이르기까지 단독으로 하명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대중의 뜻을 존중하시고 공의에 의해서 결정하셨고 그리고도 미치지 못한 점을 떼워 주시면서 대중들을 이끌고 가르치며 선도하셨다.
그래서 불공에 대한 표어도 선원대중들로 하여금 관심있게 깊이 생각하고 궁구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신 후 결정하셨으니 곧 사사불공 처처불상이었다. 이 표어는 후일 처처불상 사사불공으로 순서를 바꾸었다. 이 표어가 나온후 정전의 불공법 내용도 다소를 수정 편집에 임하도록 해주셨다.
또한 교리도도 처음에는 팔괴로 그러져 있었는데 이를 다시 수정  불교정전에 실리게 되었다. 이 교리도에 비로소 일원상을 중심으로 신앙문과 수행문이 나누어져 나오게 된 것이다.
언제나 대종사님은 의견을 제출하라 하시어 좋은 의견은 받아 주시고 시정할 것은 바로 잡아 주셨다.
누구나 자기의 생각을 말씀드리는데 주저함이나 망설함이 없었다. 나는 이런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하나 배우며 나름대로 의견을 이것저것 말씀드리기도 했던 것이다.
어느날 정산종사께서 불교정전편찬에 불교혁신론이 나온것을  보시고는 대종사님께서 우리 교리가 먼저 나오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을 드렸다. 여기에 대종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무엇이든지 동기가 있어야 한다. 체모만 보지말고 여러 가지 상황과 동기와 과정을 보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교혁신론이 먼저 나오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이렇게 하여 초안되었던 정전을 많이 보강했던 것이다. 처음 편집했던 불교정전에는 목우십도송과 사십이장경이 들어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 부산에 가셨을 때 이 두 고경을 강의하셨고 총부에 돌아오시어 불교정전에다 넣으라고 말씀하시어 싣게된 것이다.
대종사님의 초창기 교단의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대도회상으로서의 기틀을 잡아주시는데 여념이 없으셨다. 그러나 이념과 사상을 활발히 실현해 나갈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종사님은 더욱 세심한 주의심을 우리들에게 심어주셨고 그러나 주체적 사상과 제도의 운영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를 일깨워 주셨다.
이처럼 제생의세의 큰 포부와 경륜을 제대로 펴보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기본 경전이 될 정전을 출간하기 위해 노심초사 하시다가 거의 편집을 마치게 되었고 출판의 관문에 이르게 되었다. 언론의 자유마저 빼앗겼던 일제시대의 불합리성 때문에 우리글을 우리 마음대로 인쇄할 수가 없었다.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서도 허가를 얻기가 퍽 힘들었다.
그러나 이미 출판하기로 한 것이었으므로 관할사무소인 항무국에 정전출판 허가서를 신청하게 되었다. 일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된 내용을 샅샅이 살펴보고는 원고를 반려시키고 말았다. 이유는 일본의 황도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느 모로든지 트집을 잡아 출판을 방해하려는 의도적 소행이었다.
또 한편 교기를 만들때 대종사님께서 팔괘기를 일원기로 변경해서 만들어 보라는 말씀을 받들고 둥그런 원에다가 갖가지 색을 칠하게 되었다. 빨강, 노랑, 파랑등 물감을 칠해서 대종사님께 어떤 빛깔이 좋은지 감정해 주시라고 갖다 드렸다. 이때 김모라는 한국인이 이 일원기를 보고는 고등계에 밀고를 하고 말았다. 일인들은 그것을 보고 자기네 국기를 가운데 도려내고 만든것이 아니냐하여 대종사님에게 출두명령을 내렸다.
대종사님음 고등계에 가시어 이 일원기는 일장기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 신앙의 대상으로서 만든 것이며 거기다가 색을 칠해 본 것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더 이상 흠을 잡을 수 없었던지 그들은 대종사님을 나가시게 하였다.
일인들의 만행이야 어찌 우리 교단에 미치는것 뿐이었겠는가? 민족과 국토를 자기들 마음대로 짓밟았으니 나라의 울분이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그들의 정책은 우리 교단에도 사사건건 간섭과 트집으로 귀찮게 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뜻을 굽힐수는 없었다. 정전의 발행은 교단의 중대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고심하던중 하나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고, 막연했던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
나와 범산이 다시 쓰고 정리하는중 불교의 김태흡 스님이 순회강연차 이리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리경찰서에서 우리에게 들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이 강연회에 유산 유허일 선생은 사회를 했고 나도 여기에 참석하여 강연을 들었다. 강연이끝난 후 우리 일행은 김태흡 스님에게 대종사님을 소개하면서 한번 뵙지 않겠느냐 하여 모시고 총부로 오게 되었다. 현재의 청하원을 그 당시 응접실로 활용하던 때라 청하원에서 대종사님을 뵙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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