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광 교무·원광대 교수(논설위원)
제법 오래 전의 일로 기억한다. 당시 교육부장관을 모셔 교육 심포지움을 연적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국민 모두에게 화두는 '어떻게 하면 학교현장이 살아나도록 할 것인가'였다. 그러나 이 화두는 지금도 풀리지 않은 숙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관의 뜻은 두 마리 토끼를 쫓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허락하기도 어렵고 그럴만한 역량도 부족하다는 거였다.

그 두 마리 토끼란 '수월성과 평등성'이라는 의미였다. 수월성을 추구하는 측면으로 우리 국민 중 일부지만 한국에서는 자녀교육을 시키지 못하겠다는 생각에서 외국으로 떠나려는 입장이다. 한국의 교육이 수월성 교육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또 다른 측면은 대다수 국민들이 그래도 현재와 같이 평준화 같은 제도를 유지하길 기대하는 이른 바 평등교육의 주장이다. 어느 한 쪽 입장이 반드시 옳다고 단언하기 보다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어떤 제도가 보다 도움이 될 것인가를 고심할 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경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공정한 경쟁이라면 이를 통해서 사회발전의 동력을 이끌어 낼 인재를 길러내고 그가 사회발전의 견인차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인적 자원은 양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런 경쟁 시스템을 거부한다면 그 사회는 그 만큼 침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교육복지측면에서는 소외된 계층을 끌어안고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을 외면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어느 쪽을 택한 들 양자의 불만을 해소하기는 어렵다는 고뇌에 찬 장관의 목소리는 지금도 여운으로 남는다.

우리 교단도 예외는 아니다. 강자와 약자, 지우 차별, 성장과 분배의 목소리와 같은 상이한 차별의 모습 속에서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선다면 과연 어떨까? 대종사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면 어떤 결단을 내리실까? 결국 종교도 인간에 의해서 생명력이 부여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심지어 교리나 교법의 우월성만으로 종교의 생명력을 보장받는다는 담론조차도 결국 인간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에서 발전의 동력을 야기할 창조적 소수는 절실하다. 만일 다수의 의사결정에 맡겨버린다면 절차상의 문제는 면할지 모르나 그것이 생존을 담보하기에는 무리다. 그렇다고 해서 대다수의 구성원을 위한 배려의 절실함을 외면할 수도 없다. 여기에 의사결정자의 고뇌가 있을 것이다. 왜 교단의 후세대인 예비교무 지망생이 감소할까 하는 화두는 이제 그 어느 것보다도 해결을 기다리는 절박한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지혜를 얻기 위해 초기 교단이나 과거를 돌아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과거의 잣대로 문제 해결을 강요하기 보다는 정체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주에서 새로운 잣대를 개발해야 하는 일이 시급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종교의 생명력은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설득력 있는 새로운 잣대를 창조 해 내느냐와 무관치 않음을 시사한다. 왜 그토록 공동체주의, 공익심을 강조한 체제는 퇴색의 길로 접어드는가? 만일 우리의 현재와 같은 삶의 척도가 지속된다면 과연 언제쯤 예비교무 지망생이 증가세로 돌아설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의 현상이 올 것인가를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

교육부장관의 고뇌에 찬 화두인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일이 어디 교육에만 국한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장과 분배, 질과 양, 창조적 소수자와 다수자와 같은 숱한 차별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지혜롭고 균형 잡힌 우선순위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느냐에 따라 개인도 집단도 그 운명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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