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당
초창기 야학 실시로 젊은층 교화의 장 열어
정기훈련 토착화, 체육활동 강화, 봉공활동을 시행지침으로
서마산과 산청군에 교당이 과제
교화단 통해 기질변화
가정을 법도량화
지역사회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그 이념 그대로를 실현하면서 진리의 신앙으로 뿌리내리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교화사업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화단 활동을 통해 안으로 각자의 기질을 변화시키고 밖으로 가족들을 교화하여 일원가족으로 함께하는 신앙인이 되고 수행인이 되도록 적극적인 교화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마산에 일원의 법음이 울려 퍼지기는 원기 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진영교당 김지현 교무와 초량교당 임칠보화(고인)님의 염원으로 시내 회현동에서 첫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는 임관심옥님 자택에서 1년동안 출장법회를 보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원기 37년 7월 칠보화님의 희사금과 일반교도의 협력으로 추산동 60번지 와가 1동을 매입 9월에 첫 봉불식을 갖고 초대 김지현 교무가 발령을 받고 부임하였다.
이때 교당에서는 문맹 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야학을 실시하면서 젊은층 교화의 장을 열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원기 40년에 학생회를 창립, 우너기 41년에 김해에 출장법회를 실시했다. 다시 원기 42년에 어린이회가 조직되었고, 원기 43년 청년회 결성을 보았던 것이다.
원기 48년 송영지 교무가 부임, 초기 교화의 기반을 굳히면서 본격적인 교화의 도량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원기 53년 8월 상남동 109번지 대지 22평을 매입 11월에 추산동 구 교당을 매각 처분하여 원기 54년에 이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신축된 법당이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라서 교화장소의 협소함으로 애로와 복잡은 뒤따랐던 것이다. 9월에 접어들어 새로 입교한 교도 김정암씨는 교당의 상황을 파악하고 특별 희사금 2백만원을 내놓게 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62평의 법당과 부속건물 25평을 건축하게 되었고 원기 58년 4월 8일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일반법회 장소인 법당이 제대로 마련되었고, 그러면서 인근에 연원교당을 차례로 설립해 나갔다. 원기 41년에 김해교당을 선두로 출장법회로부터 교화의 터전을 마련 원기 51년에는 창원, 52년에는 삼천포, 53년에는 고성, 54년에는 진해, 56년에 의령과 신마산, 원기 61년 군북등에 교당을 창설하였다. 원기 65년에는 노인교화와 말년의 수양을 위해서 수양원 설립에 뜻을 두고 창원군 동면에 시가 3천만원 상당의 터를 마련, 마산수양원이란 간판을 걸게 되었다.
이렇게 마산교당은 자체 정비는 물론 8개 교당을 창설함과 동시에 1개의 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무아봉공의 이념실현
눈부신 활동의 댓가로 원기 56년 10월 교단의 거교적 행사인 반백년기념 행사식전에서 연원교당 불리기에 종합 3등으로 수상했으며 교화 3대목표 추진운동에도 종합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원기 56년에 제3대 권우연 교무가 부임하였고, 원기 58년에는 제4대 송순봉 교무가 부임하게 되었다.
완전히 교화의 틀이 잡힌 마산교당은 안으로 뿌리내린 저력으로 대사회적인 공익활동에 서서히 눈을 돌려 나가기 시작했다. 원기 59년 봉공회를 결성하였다. 이 봉공회 내에는 남자들만의 모임인 삼동회가 있고 운수회(30~40대), 연화회(50~60대), 보은회(70~80대)가 있어 각기 분과별 모임을 갖고 그에 따른 활동과 법회를 주관하고 있다. 그리고 매월 1회씩 부부법회가 있으며 동원회라는 조직이 되어 있다. 봉공회는 주로 대 사회적 활동을 하며 동원회는 교도 상호간의 애경과 친목을 주로하여 안과 밖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학생회에서는 여름 방학을 활용, 섬마을에 봉사활동을 벌여 무아봉공의 이념을 현실에서 체험하기도 하면서 학생회 출신들의 연대감을 이어 나가기 위해 한길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한편 청년회에서도 농촌 일손돕기에 공로가 크다 하여 원기 60년에 경남도지사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또한 12월 자선의 달을 맞이하여서는 불우이웃돕기 위한 1일 찻집등을 개설 그 이익금으로 양로원을 방문하여 외로운 노인들을 위로하고 잠시나마 친 자녀의 역할을 하도록 했던 것이다.
원기 62년 5월 제5대 이정은 교감이 마산교구 교구장으로 부임하였다. 마산교당에서는 복잡해지는 사회속에서 정신적 피로와 각종 공해로 인한 육체적 피곤을 감안, 심신의 건강을 위해 요가강습을 교당에서 개최하였다. 그리고 각 가정에 법신불을 봉안하도록 적극 권장하면서 봉공활동을 전개하였다. 원기 62년 12월 이리 폭발사고시는 이재민돕기 밪및 시화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와함께 학생회원들은 파출소 군경들에게 따끈한 생강차를 공양하면서 자선의 의미를 되새겼다.
원기 63년부터 매년 1월이면 교도들의 정성을 모으는 1백일간 기도를 실시한다. 대각개교절에는 보은활동의 일환으로 BBS회원(경남 매일신문 보급원)과 전몰군경 미망인을 초청 점심공양과 운동화 한 켤레씩을 선물했다. 그리고 공공기고나의 기관장들도 초청, 공양을 하고 교당 요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여 교단을 소개하고 유대를 강화했다.
한편 12월 자선의 달에 부부자선 바자를 개최 이익금으로 양로원등을 방문, 의류와 공양품을 전달하였다. 원기 64년 6월 학생 청년 일반교도들의 합동모내기 활동을 사천에서 벌였다. 원기 65년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 새마을회관에서 교양강좌를 실시 간접교화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렇게 무아봉공의 이념을 현실에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교화활동을 구상했고 여기에 뒷받침 되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소하려는 몸부림으로 하나의 거목을 성장시켜가고 있다.
역사의 죄인 되어서야
마산교당은 원기 66년에 들어서서 새로운 난관의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마산시의 일원이었던 창원이 창원시로 다시 분리되고 국제관광 도시로써 건설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새 부지에 대한 계획적 분양이 있게 되었다.
1동에 어느 종교이든 1개 종교만이 세워지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상가와 관공서 주택까지도 국가 정책에 의해서만이 마련되도록 되어있어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억만금을 갖고도 확보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번다시 생각할 여유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장 땅을 사들일 자금이 없어 난관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잠을 설치는 연구와 자금 마련에 노심초사, 이때 정명덕 방정신 부부는 1천만원이란 거금을 흔쾌히 성금으로 내놓으면서 교당은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1천만원을 기초로 261평 부지를 3천만원에 매입하였다.
교당 명칭은 창원 중앙교당으로 하고 금년들어 신축하고 있다. 73평의 단층 건평을 5천만원 예산으로 3층 건물을 계획하고 있다.
이정은 교구장은 긴박한 상황에서 갑작스런 자금마련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어떤 사명감으로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만일 그 당시 기회를 놓쳐 버렸더라면 나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이룩되기도 하지만 한사람의 역사의식이 좌우하기도 한다. 만일 분양의 기회를 무심코 넘겼더라면 오늘날 어떻게 되었을까?
마산교당은 원기 66년 교당 앞터 15평을 1천5백만원에 매입, 금년부터 유치원을 개설 2개학과 원아들을 교육하게 되었다. 자모들의 교화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학생회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 실시하고 있으며 경남대에 원기 66년 경원회가 조직되었고 마산대에도 대학생회가 67년에 창립을 보았다. 1주일에 1회씩 법회를 보고 있으며 학교 축제때면 연중행사로 사상강연회를 개최하여 대학생 교화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한편 마산교당은 교구 수반지 교당으로써 훈련하는 교구  봉공하는 교구로 성장하기 위해 정기훈련 토착화, 체육활동 강화, 봉공활동 시도를 시행지침으로 내걸고 있다.
앞으로 서마산 교당설립과 산청군에 교당 마련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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