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의 유학과 송준필 선생
본교 사상의 근대사상사적 지평, 유학에서 검토
정산종사는 공산선생 에서 유학을 공부

1, 원불교 사상의 한국사상사적 접근
원불교 사상을 한국 근대사상사라고 하는 지평에서 조명하는 일은 원불교 사상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사상사적 접근이란 임 형성된 사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형성과정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사상을 육체에서 분리된 정신의 소산으로 보지 않으며 시간과 장소와 역사, 사회, 문화적 긴장과 자극으로부터 무관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상이 형성된 당시의 사회적 관심이나 지적배경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원불교 사상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한국사상의 흐름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학사상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성리학을 핵심으로 하는 조선조의 유학사상이 17  18세기에 와서는 조선왕조 지배이념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지만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조선후기 실학으로 나타났고 19세기 전반에는 척사위정 사상으로 또한 근대 서구사상의 영향을 받아 동도서기 사상으로 혹은 유교개혁 사상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근대사상의 기저에는 유학사상의 흐름이 지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불교 사상의 형성과정에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한국 근대 유학사상이 일정하게 영향하였다고 보아진다. 그렇다면 원불교 사상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근대 유학사상은 과연 어떠한 흐름의 유학인가 하는 점이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의 해명을 위해서는 공산 송준필(1869~1943)의 유학사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불교 교리형성 과정에 정산종사의 공헌은 대단한 것이었고 정산종사의 학문적 배경은 유학이었으며 정산종사는 송공산에게서 유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2, 송준필 선생과 정산종사
공산선생은 1869년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조부인 송홍익 선생으로부터 한학의 기초를 익히고 18세부터 30세까지는 당시 퇴계학의 후예인  장복추의 문하에서 유학을 배웠고 공주 이진상이나 서산 김흥낙의 문하에서도 문학한바 있었다. 그리고 면우 곽종석, 회당 장석영, 간제 전우와도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소식을 듣고 안동의 유림들과 <>를 올렸고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국책보상운동에 앞장서서 6개월간 향회를 다니며 모금운동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심산 김창숙과 곽종석, 장석영등과 함께 유림단의 파리장서 계획을 공모하여 파리의 평화회의와 총독에게 보내는 탄원서와 함께 <통고국내문>(공산지음)을 작성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3월4일로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4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그해 7월 무죄석방 되었다.
그후 선생은 저술과 후학들을 가르치기에 전념하다가 만년(65세)에는 김천 황학산에서 은거하던 중 1943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만년의 황학산에는 지금 그의 사당인 숭덕사와 원계서원이 있다. (김천시 원동 소재)
공산 선생은 1907년 겨울부터 고산동에서 서당의 생도들을 가르친 바 있는데 1914년 가을에는 생도들이 점차 늘어나서 수용이 불가능하여 의 건물을 신축하고 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지금 고양서당으로 남아 있다.(고산동 소재)
정산종사는 1900년 공산 선생의 고향인 고산동과는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초전면 소성동에서 태어나 8세시에 조부로부터 한학의 기초를 익히고 17세에 스승을 찾아 전라도 지방을 순역하던중 1918년 대종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어려서 고개를 넘어 고산동에 있는 서당을 다녔다는 사실은 곧 공산선생의 사숙에서 유학을 배운 것이다. 공산선생 문집에 보이는 서간<()>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다만 당시 정산종사 유학이 성리학의 어느 정도까지를 공부하고 있었으며 왜 유학을 배우다 말고 더 큰 스승을 찾게 되었는지 하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이로 보아 유학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여지지는 않으며 정산종사의 도학에 관한 포부는 유학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었음을 알게되어 새로운 스승을 찾아나섰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3, 송공산의 유학
공산 선생은 17세 때에 영남학파 이진상의 강회에 참석하고 18세에서 30세까지 사미헌 장복추의 문하에서 배웠으므로 그의 유학사상은 주로 사미헌의 영향하에 확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리설은 <>(4권)에 체계적으로 밝혀 있는바 당시의 성리학설이 이나 로 나뉘어 영남학파나 기초학파의 대립적 입장에 있는 것은 양쪽 모두가 일면적 이해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여 그의 독특한 을 주장하였다. 이 저술은 송대의 성리설과 퇴계 이후의 성리설을 종합한 성리학설의 일대집성이라 할 수 있으며       의 논의를 집약하고 있다.
공산은 예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10권)이라고 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공산의 예학은 유가의 정통적인 에 관계된 전적을 망라하여 관  혼  상  제의 가례와   의 향례를 포함하여 의 의식절차를 도설과 함께 정리하고 각 의례의 절차에 관한 유래와 의의를 주석하였다.
또한 역사저술로 <속속자치통감강목>(10권)이 있다. 이의 저술동기는 잘 밝혀져 있지 않으나 송대 사마광의 <자치통감>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상락의<속자치통감강목>에 이은 저술임을 알 수 있다. 이 저술은 명태조 원년(1368)으로부터 청조가 멸망한 신해혁명(1911)까지 명  청대의 역사를 편년예로 기술한 것으로 그의 역사인식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저술이다. 또한 공산은 이책 다음으로 단군이래의 한국사를 기술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그 외에도 정이천의 을 도해하여 의 실천심법을 의 논설속에서 정리한 <>등이 있다.
공산 선생은 사회규범으로서의 유학이 서서히 붕괴되어 가던 시기에 도학자로서 성리학의 정통을 밝혀 그 종지를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모든 유학자들의 주장을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30대에 나라의 비운을 보고 국채보상운동이나 <참오적소>유림단의 장서계획등에 적극 앞장섰던 일면은 그의 민족의식과 현실인식의 철저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4, 원불교 사상과 유학사상
일원의 진리는 언어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라 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교법이란 궁극적 진리를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한 것이며 그것은 당대의 사상적  문화적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원불교 사상은 불법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체계화된 교리의 바탕에는 유학적 논리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원불교 교리의 형성과정에서 정산종사의 공헌으로 보인다. 최초법어에 보이는 삼강령 팔조목의 명칭에서부터 원불교 예전에 이르기까지 교리의 조직적인 체계화는 불교적이기 보다는 유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원불교 사상의 삼교합일 내지는 통종교적 사상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유학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본고에서는 정산종사의 학문적 배경이 유학이라는 점에서 원불교 사상을 유학과 관련하여 해명할 필요가 있다는 몇가지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원불교의 우주론, 인성론이라 할 수 있는 진리의 설명에 있어서 <일원상 진리>나 정산종사 법어<원리편>에 보이는 설명체계는 유학의 이기론이나 심성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신정의례>에서 비롯되어 <원불교 예전>으로 완성된 원불교의 예전 체계는 불교정신에 바탕하면서도 당시 사회의 일반적 규범이었던 유교적 예의 정신을 포용하고 있다.
정산종사의 저술인<불법연구회 창건사>는 그 기술방법이나 체제가 유교적 역사인식에 바탕하고 있으며 특히 원불교의 역사관은 다분히 동양중세적인 교훈적 역사 또는 퇴보시관에 근거하고 있다.
해방후 정산종사의 <건국론>에서 보여준 사회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태도와 그 해결책의 제시는 공산선생을 포함한 도학자의 경세가적 기풍으로 볼 수 있다.
대체로 위와 같은 몇가지 인식을 바탕으로 공산사상과의 관련하에서 원불교 사상의 유학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정산종사는 대종사의 문하에 귀의한 후로 유가의 경전을 멀리하였지만 불교정전의 편찬, 창건사의 저술, 예전의 편찬 등의 과정에서 유가의 전적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원불교 사상의 한국 근대사상사적 지평은 근세유학에서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교무  원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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