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새 불토 이경식
대종사님 그 이글거리는 불씨를 제게도
작은 기도는 끝났지만 영생을 기도하리

입교 스무해가 넘도록 영산 성지 순례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몇해 전인가 나는 맹렬한 충동으로 성지 순례에 나서려는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건이 맞지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아니 좀더 정확한 이유는 성지를 아끼는 충정과 동경하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옮을지 모른다.
더 많은 일월을 두고 오래오래 그리워하면서 가슴 깊이 벅찬 희열을 묻어 둔 채 살고 싶었다고나 할까. 또 한편으로는 성지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막상 부딪쳤을 때 실망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용기를 못냈다는 편이 더욱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회정진 일백일 기도회향이 6월6일이란 건 전혀 의도밖이었다. 마치 대종사님 탄생일이 양력 환산 결과 5월5일 법정 공휴일인 어린이날과 일치하는 것이 뜻밖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4명의 어린이를 포함 42명의 교도님들이 이욱원 교무님을 모시고 대절 버스에 오른것이 6월5일 7시 황금연휴란 말을 평생 처음으로 실감하는 기분이었다. 차중에서 교무님 주제로 기도를 모시고 성가를 부르며 가다보니 어느새 총부에 도착했다.
우리는 총부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성탑  영모전 등을 참배하였다.
특히 대종사님께서 거하시던 구조실에 들려 초상앞에 예배할 때는 뜨거운 감회에 젖었다.
점심식사 후 나와 아내는 심선생과 함께 최자은 교무를 앞세워 투병중이신 처산님을 찾아 뵙고 돌아와선 모내기에서 막 돌아오신 법타원님께 인사드렸다. 교무님 안내로 이정화 법사를 뵌 것은 처음 드린 인사였다. 시간에 쫓기어 박물관 구경을 얼렁뚱땅 해치우고 정산법사 사진만 한 장 구해 버스에 다시 올라 우너광대 구내를 한바퀴 돌면서 안내 교무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지방대학 중에선 조경이 가장 잘 돼 있다는 소문이 틀림없는 듯 원대는 올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어서 흐뭇하기 이를데 없다.
대종사님의 유일학림 집념이 이렇게 꽃필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다시 차를 달려 고창군의 비포장 국도에 시달리다가 영광읍에 닿았을때는 모두 환호성을 터뜨렸다. 나는 영광군이란 안내판을 보자 마치 오래 그리던 고향에 온 사람처럼 흥분하였다. 지도책을 펴 놓고 몇차례나 영광을 찾아보았던가.
영광에서 태어났단 사람만 봐도 고향 사람처럼 반가왔었쟎은가.
차는 다시 성지를 향해서 시골길을 달린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영산에 들어서자 교무님은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시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모두들 흥분해서 두런거리고 창밖을 이리저리 내다보았다. 동서남북 아무리 보아도 높은 산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다가 있고 그래서 한 쪽으로만 산이 있으리란 추측을 하고 있었는데 전혀 뜻밖이었다.
산이 겹겹이 둘러친 깊은 골짜기에서 대종사 같은 성인이 나시다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저 산봉, 저 바위를 대종사께서도 보셨겠지 생각하니 이 거룩한 땅에 내가 발을 딛은것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에서 내려 영모전 등 시설을 안내 받고 식당에서 저녁 공양을 하자니 쑥갓, 상치가 푸짐하게 올라와 먹음직스러웠다. 모두들 식성좋게 잘들 드셨다. 선원 기숙사 원광원 법당에서 99일째의 기도를 모시고나니 이어서 선원생들의 환영회가 베풀어진다. 이번에는 북청주 교당 교도님들이 동참하셔서 화기애애한 가운데 노래하고 대화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특히 내일이 교당마련 1백일 기도 회향날이란 북청주 교당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승화시키기 위해 즉석에서 두 교당간 자매결연의 제안과 다짐이 갈채속에서 이루어지니 얼마나 흐뭇한 시간이었던가! 28명 선원생 전원이 부른 노래들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지 천인들의 합창인양 곱게 들렸다.
남자교도 8명은 영산원 현판이 붙은 건물곧 원불교 최초의 건물로서 대종사님과 구인제자가 기도하고 공부하시던 구간도실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마치 우리 8인이 구인제자가 된 듯하여서 감개가 끝없었다.
한 분만 더 오셨음 구인제자가 꼭 맞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다가 정산께선 토굴에 계셔서 8인뿐이라며 웃기도 했다.
이튿날 4시에 일어나 세수들을 하고 영모전에 모이니 이미 촛불을 밝히고 입정중인 선원 교무님이 보인다. 늘 외는 영주이건만 오늘따라 한자 한구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고 기원문 낭독이며 독경이며 모두 새 기분이다. 선원장 주타원님의 간절한 기념 법설을 받들고 1백일 기도회향을 마치니 새벽빛은 부유스럼하고 양면 벽엔 대종사님 십상도가 더욱 거룩하게 보인다. 작은 기도야 끝났지만 큰 기도야 어찌 끝나랴. 평생을 바쳐 기도하고 영생을 기도할 것이다.
교도님들은 다시 성지 학교를 거쳐 중앙봉으로 올라갔다. 앞서 올라오신 북청주 교도님들은 요가체조가 한창이셨다. 창립 4년에 성지순례를 오신 그분들의 열성과 신심에 존경이 가고 고마웠다.
안내 교무님의 설명에 따라 삼산의 밤나무골봉이며 팔산의 대파리봉이며 눈을 돌려 가자니 산봉엔 아직도 구름과 안개가 띠를 두르고 있어 기도봉의 신비를 더해주고 있다. 발길을 돌려 능선을 타고 내리니 노루목 대각터다. 만고일월 글씨조차 눈짓하고 미소하며 대각의 그날을 빛나게 증언하고 있었다. 우리는 산형을 보며 노루의 머리가 어디라는 둥 몸통은 어디까지라는 둥 한 마디씩을 거들며 그날의 영광을 회고했다.
노루머리에 솟아있는 노거수와 그 옆에 있는 샘을 보고 대종사님 성안을 익히 뵈웠을 것이라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간절했다. 대종사께선 대각전에 부스럼으로 용모가 흉하고 광인으로 치부되어 있어 마을 사람들이 노루목을 피해 다녀 새 길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며 당시 고행 난행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나 절로 숙연해짐을 느꼈다.
이어서 복원된 탄생가를 참배했고 옆에 있는 도실터에서 심고하고 성가를 불렀다. 재목조차 각별히 다루어 지었다는 탄생가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민속촌의 고가를 보듯 신기하여 모두들 굴뚝이 어떠하니 부엌이 어떠하니 하면서 떠들었다. 부엌에 이어 있는 외양간을 보며 그 곳에 있었을 소까지도 그리워졌다.
1차 방언공사 길목을 따라 걸었다. 보은강 물목을 끼고 가자니 수련과 갈대와 버드나무 등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대맞춰 각색 이름모를 새들이 아침부터 울어댄다. 엊저녁엔 뜸부기  꿩  개구리 등이 울었었다. 대종사님도 저들 소리를 들으며 사셨겠지 하고 생각하니 황홀한 전율이 뼛속까지 엄습한다. 우리는 갯가까지 나가서 3차 방언 공사로 완성된 8만평 정관평을 가슴 뿌듯이 바라보며 대종사님과 초기 선진님들의 피나는 노고에 경탄과 감격을 느끼며 어쩌다 이런 성자의 법을 내가 만났을꼬 하는 행복에 몇 번이나 목이 메었다. 대각후 대종사께선 산간에 은둔해 버리거나 가만히 앉아 시봉이나 받는 성자가 아니라 발벗고 팔걷고 나서서 바다를 막고 엿고고 숯파는 농공상을 시번하신 활불이심은 우리 중생에겐 얼마나 크나큰 행복이겠는가!
아침 공양에 늦을세라 서둘러 오자니 갯가에서 논두렁에서 발발거리며 도망치는 새끼게들조차 유정하기 그지없다.
선원 대중과 작별 후 마당바위를 향해 산행에 나섰다. 두 해전에 대학생들이 다시 뚫어 놓았다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데 예사로 험한 길이 아니었다. 모두 순례일념으로 기를 쓰고 걷지만 연세 드신 분들이며 여자분들은 고행길이었다. 예전엔 숲이 더욱 깊었을텐데 이 길을 어떻게 허구헌날 5년간을 오르내리셨을까? 그것도 열 한 살 어린 나이부터 말이다. 대종사님께선 필시 극성맞은 개구쟁이였을 거라며 웃기도 했지만 나에겐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집에서 불과 십여분 거리의 교당을 왕래하며 단 백일간 기도를 모시면서도 힘겨워하고 귀찮아 하던 자신을 돌아볼 때 한편으로 너무나 부끄러웠고 또 한편으로 대종사님의 그 치열한 구도열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정상에 가까워지니 모시풀이 많았다. 어떤 여자 교도님은 산딸기에 눈독을 들였고 또 어느분은 계속 취나물을 뜯으면서 올랐다. 거의 다 오르니 샘터가 있었다. 모두 땀을 들이며 청렬한 석간수대종사님께서도 드셨을 그 물을 한 바가지씩 마시니 정신까지 쇄락했다. 드디어 마당바위! 원청 대학생회에서 삼밭재 마당바위란 석비를 세워놓았다. 내려다보니 구호동 옛집터가 아득히 보인다. 이 높고 험한 곳을 어찌 그리 대담히 매일처럼 오르내리셨는고 생각하니 대종사님이 너무 높아 보였다. 내가 몇 백번이나 죽었다 깨나야 그분 옆에 갈것인가?
우리는 기도를 모셨다. 나는 심고를 하면서 대종사님께 어린애처럼 보채고 있었다.
대종사님! 불씨 좀 빌려주십시오. 불씨를, 그 이글거리는 불씨를 제게도 조금만 주십시오. 아주아주 쬐금만이라도 좋으니까...네? 네?
나는 눈물이 넘쳐 흐르는 것조차 미처 몰랐다. 사나이란 자존심이 값싸게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마당바위에서 그게 무너졌다. 탄생가에서도, 도실터에서도, 대각터에서도, 정관평에서도, 중앙봉에서도 솟구치는 눈물을 잘도 참아냈는데 말이다. 성가를 부르고 독경을 하였지만 나눈 자꾸 목이 메어 몇 차례나 중단하고 가만히 격정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불꽃이 피어 있었다.
정관평 갯가에도 노루목 샘가에도
밤나무골, 눈썹바위, 옥녀봉에도.
오뉴월 한낮을 뻐꾸기는 우는데
불꽃은 산처럼 타고 있었다.

삼밭재 마당바위 하늘자락에
자갈돌 모서리 차돌눈이랑
모시풀 가냘픈 이파리에도
불씨는 한 아름씩 남아 있었다.

나는 한창 잠덧하는 젖먹이처럼,
그 이쁜 불씨 좀 빌려 달라고
담배씨만큼만 꾸어 달라고
염치없이 자꾸만 보채대었다.
님은 달마처럼 버티시는데
나는 팔뚝 하나 자르지도 못하고
손가락 한매디 자르지도 못하고
눈물만 찔끔 아주 쬐끔 보여드리고
불씨를 내놓으라고 졸라대었다.

교무님은 살밭재에 몇 번이나 오르셨습니까?
안내차 동행하신 오교무님께 넌지시 물어 보았다. 속으로 가늠하기는 서너번쯤 되겠지 하였다. 잠시 망설이던 교무님께선,
한 백번은 되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나는 내심 어안이 벙벙했다. 저 연약한 여자분이 그 험한 곳을 백 번이나 오르내리다니? 그것도 영산에 온지 3년에 불과하시다는데, 1백번도 말투로 보아 어지간히 에누리한 숫자인 모양이니 저 분은 분명 불씨를 얻은 분이리라고 생각되어서 마음 깊이 합장을 올렸다.
옥녀봉도 오르고 싶고 법성포도 들르고 싶고 선진포, 백수읍내, 가고 싶은 곳도 많지만 시간에 쫓기며 내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 아쉬워서 거듭 뒤돌아보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차는 점점 성지에서 멀어진다.
돌아오는 길, 노래하고 춤추며 소창을 즐기는 동안 버스는 밤공기를 가르며 서울을 향해 줄기차게 달렸다. 마침내 고속도로 톨게이트꿈처럼 다녀온 성지, 우리는 또다시 문명에 찌들린 수도 서울 그 불야성 속으로 몸도 맘도 빨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아직도 영산의 산이, 들이, 집이 형형한 불꽃을 뿜고 있었다.<교도  도봉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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