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교당
유아원 개설로 교화에 활기 교당이전을 계획
전교도가 대내외적인 봉사활동 전개
대종사 재세시 창립

남원시내에서 약 20~30분정도 차를 타고 산을 오르듯 가게되면 지리산 줄기의 기슭에 자리한 운봉면 소재지에 도달하게 된다. 해발 6백여미터가 넘는 남한 유일 고우너지대로 마치 구름위에 솟은 듯 하여서 한 폭의 그림같은 마을로 산명수려함은 가히 도를 닦는 들이 발을 멈출만한 곳이다.
제세성자가 세상에 출현하시와 교화의 문을 열으심에 기연을 따라 반드시 지방과 인물을 얻어지는 것은 바람뒤에 비가 따르는 것과 같으나 일제의 어려운 시대에 한 교당이 창립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숱한 사연과 정성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험난한 시대에도 법의 줄기는 원기 20년에 혈심의 전법제자인  박사시화 선생께서 뜻한바 있어서 황무지인 운봉을 수차 내왕하면서 지성을 다하던 끝에 창립주가 된 이복전씨를 귀의케 하고 점차로 노우성등 다수의 사람들이 입교하여 모이게 되자 이복전씨댁에서 삼대요령으로 공부하며 야회를 보게 되었으니 법의 종자가 드디어 싹이 돋게 되었다. 교도가 날로 증가하여 6십여명이 되자 남원 정관음행 교무를 월 3회 초청하여 14개월을 법회를 보아오다가 원기 24년 이복전  노우성  조성남씨가 자신들의 패물을 매각하여서 동천리 소재 고가 1동을 매입 수리하여서 교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법의 전당이 서게되자 교단인가와 더불어 총부에서 전임교무로 서공남 선생을 보내게 되어 씨뿌린지 4년만에 거두고 가꾸고 받아가는 체제가 갖춰져서 교화도량의 면모를 오나비하게 되었다.
도량 확장과 교화 활성
원기 31년 4월 서공남 교무가 7여년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후임으로 이정화 교무가 부임하였다. 해방이라는 사회상황의 대변혁과 더불어 대중들의 활발한 생활로 인하여 교당도 활기를 띄면서 기조건물에서는 협소함을 느끼게 되어 교당신축의 필요성이 요청되므로 교당자체에서는 부채장사를 통하여 신축기금을 마련하고 또한 교도들의 다소의 성금과 또한 박창기 선생의 의연한 기지와 이수인  윤창수 내외가 특별희사한 목재로써 32평의 법당을 착공 1년만에 완공하게 되었다. 이 공사중에 특히 박선교(현 송천교도)씨의 헌신적인 봉사가 깃들어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 공사를 통하여 건강을 잃게된 교무는 끝내 전임되고 박은국 교무가 부임하였다. 새로운 발전을 기약하면서 공사의 뒤처리를 하며 교화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민족의 비극인 6.25를 맞게 되었다. 국난의 어려움속에서도 선생은 무사히 교당과 동지들을 안보하였다. 그리고 4년동안 큰 변란을 치루면서도 오롯이 지킨 결과 법맥은 다시 원기 38년 송영봉 교무에게로 이어져서 활기를 띄게 된다. 전란 후 피폐된 사회상호아 속에서 대중과 어려움을 같이하며 이의 복구에 정성을 기울이면서 특히 황량한 대중의 마음에 희망의 빛이 되고 힘이 되도록 교화활동을 적극 전개하였으니 어린이  청소년과 더불어 일반에 이르는 전체교화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이러한 교화에 바탕하여 유지토대가 이복전  박장현 양씨의 특별한 희사로 확립되고 교세는 넘쳐 흘러서 이웃 지역인 아영까지 미쳐서 출장법회와 더불어 바로 교당을 신설하였다. 원기 42년 신제근 교무가 부임하였다. 그리고 44년 뜻하지 않은 계기가 왔다. 현 교당 자리는 모 부호가 일제시대에 평지조산을 하여서 별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것이 빚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을 이복전씨와 연결이 되어 개조수리하면 교당으로 훌륭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매입을 서둘러 특별희사 하였다. 그러나 개수하는 것까지도 교당힘으로는 겨웠으나 힘을 합하여 공사를 마치고 이안봉불을 하니 그 당시로썬 교단 유일의 교당으로 자처해도 틀림이 없었다. 천연도량에 웅장한 건물은 맑은 정기를 불러 일으킬 듯 하였고 운봉을 대변하는 명소가 되었다. 이러한 대역사를 원만히 마치고 신제근 선생은 떠나고 47년 이은석 교무가 부임하였다.
영육쌍전의 실천도량
항상 큰 일을 치루고 나면 그 뒤치다꺼리가 따르기 마련인데 미진한 공사를 정리하고 다소 침체했던 교화에 전력하다가 49년 5월 이임하고 안경서 선생과 김혜실 교무가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침체된 교화에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면서 유지전답을 다소 자영으로 경영하며 공동출역을 통한 간접교화의 효과를 거두며 교당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교화활동을 시도하던중 교무가 원기 52년 4월 떠나고 이광정 교무가 부임하였다. 그동안 정체된 교화를 감지하고 자나깨나 교화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어린이  학생  일반법회를 일괄적으로 보면서 대봉사 활동을 대내외적으로 전개하고 또한 교리실력 배양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울타리가 없어서 교화도량이 산발적으로 개방되어 관리에 애로가 많음을 보고 철조망으로 2천5백여평의 도량을 감싸니 한결 경계와 관리에 효과를 가져왔으며 새롭게 일신하는 계기가 되지만 이러한 일을 하는데에도 교도들의 정성과 교무의 대단한 용단과 땀의 결정이 있었다. 원기 56년 5월이 되자 후임 이보원 교무가 부임하였다.
그동안 건물자체가 상당히 수리를 요하였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집이 비만오면 새기도하여 기와지붕을 함석으로 개조하고 이와 더불어 농촌에 갖춰야 될 퇴비장도 마련하였다. 이렇게 영육쌍전의 터를 구비하고 60년 5월에는 이성로 교무와 김현균 부교무가 부임하였다. 잠자는 어린이  학생  청년교화에 다시 관심을 갖고 노력한 결과 깊은 잠에서 깨어나 활발한 움직임은 근로봉사로 이어졌다. 그래서 교화활동이 옛날의 정상적인 활동으로 복귀하였다. 3년의 임기를 마치고 63년 3월 떠나고 이백철 교무와 탁혜진 부교무가 부임하였다. 부임하자 동원회를 조직, 교도는 누구나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모임으로 육성하고 법우회를 조직하여(40대 남자) 교당과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단체로 육성하면서 불우이웃돕기 운동도 적극 전개하였다.
농촌의 교화양상 쇄신
65년 3월 김대훈 교무와 배심진 부교무가 부임하여 달라지는 농촌에 맞는 교화를 위해서 마을 중심지에 원광새마을 유아원을 개설하여 2학급 80여명을 수용하고 학부모들 교화를 전개하면서 유년과 청소년 교화에 대폭적인 지원과 투자를 하고 있다. 특히 일반교화는 옛교도를 찾기 위해 아침 좌선과 기도에 적극적인 참석을 권장하고 돌아가면서 가정법회를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고 있다. 앞으로 나무랄데 없는 교당이지만 마을과 좀 떨어져서 대중교화에 어려움이 수반되므로 유아원 근처로 교당을 옮길 계획으로 기금을 조성중이며 기존 건물은 훈련원  양로원 내지 생산기관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교화목표를 젊은 교당(청소년 교화) 교도찾기 대중교화에 주력(교당 이전 시급)등 농촌 교당의 본을 나토겠다는 뜻으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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