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개교절 기념특집
대각성지를 찾아서
대종사 구도역정과 대각
진리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개벽의 새날을 열게 하소서!

사진1> 만고일월비 대종사의 대도정법이 태양과 달처럼 무궁한 세월에 다함이 없이 비춰 모든 중생을 구원하고, 교단의 발전을 기원하는 뜻으로 원기 56년에 세워졌다.
사진2> 선진포 입정터 대종사께서 구도당시 법성포 장에 가시다 반나절이나 입정에 드셨던 곳.

대각의 숨결 따라
 영산 성지를 찾기 전에 대종사님 성탑 앞에서 두손을 모으고 「눈길 가는 곳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대종사님의 뜨거운 구도열정과 위대한 깨달음의 숨결을 느끼고 체받아 전하게 하소서!」 심혼과 심혼의 만남을 간절히 기원 드렸다.
 이리를 떠나 결실을 준비하는 농군들의 바쁜 일손을 차창 밖으로 스치며 몇 차례인가 차를 갈아타고 영광읍내에 들어섰다. 어느 때 같으면 그저 스쳐지나 갔을 텐데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왠지 달라 보이는 듯했다. 때 마침 장날인지라 정류장 주변을 온통 북새통이었다. 과일이며 나물이며, 생선 등을 풀어놓고 몇 푼 벌자고 앉아있는 촌로들의 갈퀴 같은 손마디가 우리네 삶마냥 가슴아팠다.
 고려 말까지 「靜州」라 불리우다 후에 「영광」으로 불리웠다 한다. 미리 성자의 탄생을 예고라도 한 듯 3천여년을 기다려온 고요한 마을이 공적과 영지가 담긴 신령스런 빛고을, 진리의 땅이라 이름 지워졌으니 우연만은 아닌 듯 싶다.
 군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두서너 명에게 원불교 영산 성지 가는 길을 물었더니 내 집 가는 길 마냥 훤했다. 군민들의 원불교에 대한 인식도가 짐작이 갔다. 군내 버스에 몸을 싣고 생각에 잠겼다. 몇 년 전 만해도 비포장도로를 터덜거리며 아침저녁으로 두어 차례밖에 없던 차편을 이용해야 했었다. 15-16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봤다. 법성가는 길목에서 하차하여 논길을 가로질러 선진 포에서 나룻배로 영산 성지를 찾았었다. 당시 만해도 궁촌벽지에서 태어나 특별한 학문의 훈습 없이 남다른 고행 끝에 대각 하셨다는 말씀들이 실감을 더했었다. 그러나 이젠 포장된 성로를 따라 곧바로 당도할 수 있으니 그때의 정경을 느껴보기엔 다소 거리가 있음이 아쉽다. 좀더 가까이서 대종사님과 선진님들의 얼과 발자취를 찾고자 만곡 에서 차를 내렸다. 영산 성지 5.5km라는 이정표가 반가웠다. 전 교도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일체생령에게 은혜의 핵을 터트린 진원지인 성지를 찾는 마음이 오늘따라 마주치는 나무하나 풀 한 포기 하나 하나가 새로운 의미를 던져 주는 듯 새잎들이 상큼함을 더했다.
 몇 백 미터쯤 갔을까하니 언덕 위에 우뚝 선 「창성교회」가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기독교 1백여 년의 역사가 얼마만큼 한국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었는지를 실감케 했다. 삼동윤리 정신에 바탕 하여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한뜻이기를 기원하며 교회를 뒤로했다.
 군데군데 흩어져있는 촌락들을 마주하며 옛 보다는 생활개선이 된 듯해 보이지만 요즘 경제적으로 시달리는 농민들의 삶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빈집들을 볼 수 있었다. 천년 신비를 담고 성지 가는 길목에서 예스러움을 지켜주었던 느티나무가 지친 농민들의 시름 마냥 풍파에 지쳐 스러져 길가에 누워있다. 푸릇푸릇 돋아나는 만물의 소생은 희망차 보이는데 길가다 간혹 만나는 촌로들의 일손에서 신바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은혜의 땅에도 아직 봄이 멀었나보다. 그러한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나 주려는지 전에 없던  오성산업 방적주식회사가 천정리 저수리를 바라다보며 우뚯 서 있다. 몇 년 전 정부에서는 농가소득 증대의 일환으로 새마을 공장을 만들어 또 다른 피해만 입혔던 기억들이 있다. 얼른 규모만 보기엔 새마을 공장 같은 느낌은 없지만 과연 얼마만큼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주려는지….
 멀리서 옥녀봉 이 성금  다가온다. 어느덧 대각지에 이르렀다. 옷깃을 여미고 진정으로 대각의 숨결을 따라 개벽의 함성을 온 누리에 전하는 정법사도이길 다시 한번 간절히 염원했다.

대각의 여명
 발길을 탄생가로 돌렸다. 대종사님께서는 원기 25년(1891년) 5월 5일(음 3월 27일) 부친 박회경 옹과 모친 유정천 여사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대종사 탄생을 전후해서 갑오경장 갑신정변 임오군란 청일전쟁 동학혁명 민비 시해 등 격동의 물결이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원기 66년(1981년)에 복원된 탄생가는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성자를 만드는 추모지정 그대로인 듯 정겨웠다. 뜰 앞의 매화나무와 뒤뜰의 고목이 된 감나무는 당시를 얘기하는 듯 순례 객을 반겼다.
 대종사님께서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7세 무렵에는 부부간의 사이가 좋은 이유와 옥녀봉에 걸린 구름을 보며 인생과 우주대자연의 조화에 대한 의심이 서서히 커가던 곳이다. 그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어 드디어 대각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 회상과는 뗄 수 없는 회상의 열림 터이다.
 대종사 11세 되던 신축년(1901년) 홍수로 인해 물길에 휩싸이자 16세 무렵에 구호동으로 이사를 했다 한다. 구호동은 산세가 흡사 아홉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형세라 해서 이름 지워진 마을로 대종사께서 20여세까지 소년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옛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단지 감나무 한 그루가 역사의 현장을 쓸쓸히 지키고 있었다.
 대종사 성장하면서 진리에 대한 의심은 날로 더해 선산에 묘제를 모시러 갔다가 어른들이 산신령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만나면 의심을 풀 수 있겠다는 생각에 11세부터 15세까지 4Km떨어진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산신령의 영험을 기원하는 구도역정이 시작되었다.
 삼밭재로 발길을 옮겼다. 얼마나 지극한 서원이었기에 어른들도 오르기 힘든 산길을 5여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했을까 상상키 어려운 구도열정이었다. 삼밭재 마당바위, 약간 기울어진 너럭바위 하나, 과연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구인 기도 봉과 함께 교단 사에 길이 남을 법인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인스턴트 시대에 살고 있는 단촉한 우리들로서 길고도 험한 구도자의 구도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러한 정성 속에서도 산신령을 만날 수 없었던 차에 대종사 15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다음해 환세 인사 차 처가에 들렸다가 고대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사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는 도사이야기를 듣고, 의심하나를 풀기 위해 구사고행을 시작했다.
 허나 결국은 도사 찾는 일도 허사로 돌아가고 겹쳐서 20세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게 되어 심적 동요와 충격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가사를 돌보면서도 오직 풀리지 않는 의심 하나에 22세 무렵부터는 갖은 고행 난행을 하면서 대각에 이르기까지 「이 일을 장차 어찌 할꼬」하는 한 생각만 깊어갔다. 때로는 주문도 외우고, 때로는 고창 연화봉 초당 등에서 정신을 수습하기도 하였으나 25세 때부터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그 한 생각마저도 잊어버리게 되는 대 입정삼매에 들게 되었다.
 대종사의 당시 답답한 심경을 헤아려나 보려는 듯 선진 나무 터로 발길을 향했다. 느티나무 몇 그루가 있을 뿐 만조가 된 잿빛 바닷물만이 옛일을 말하는 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진리를 알고자 함이 지극하였기에 장에 가는 것도 잊고 한나절을 입정상태로 보냈단 말인가.
 이렇듯 대종사가 개벽의 여명을 찾아 헤매인 고행은 말할 수 없었다.
 궁촌 벽지의 빈한함과 인지의 미개함이 세상에서 드문 곳에 태어나 도를 구하려 했으나 가히 묻고 지도 받들 곳이 없어 홀로 생각을 일어내어 난행 고행을 하였던 것이다.
 너무도 쉽게 진리 앞에 서서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를 본다. 그 처절한 난행 고행으로 개벽의 여명을 찾아 헤매인 님의 진지한 삶의 모습 앞에 절로 탄복과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대각의 환희
 원기 원년(1916년)대종사의 나이 26세 되던 병진 4월 28일(음 3월 26일) 새벽 우연히 정신이 쇄락해지며 20여년을 일구월심으로 염원했던 뭉치고 뭉쳤던 의단이 동천의 태양과 같이 밝아짐을 느끼고 이어 전날에 생각했던 모든 의두를 차례로 연마해 본즉 모두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여 「心獨喜自負」하셨다 한다.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아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 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는 대각일성과 함께 대종사께서는 세기말의 혼돈과 절망이 떠돌고 있는 선 후천 교역의 기점에서 암담한  어둠을 가르고 후천 개벽의 법고를 울린 것이다.
 당시는 오백여년간 계속되어 온 세습 왕조사회의 몰락과 함께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어 노는 시기였다.
 각종 종교운동이 활발했고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로 인해 사상적인 공백이 극심했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갈구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국을 간파하시고 대각후 대종사께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 아래 「장가ㆍ약자 진화상의 요법」「병든 사회의 치료법」등을 선포하고 제생의세의 뜻을 펴기 시작했었다.
 바야흐로 후천 개벽성자의 새 세상 건설을 위한 개벽이 함성이 구수산 99봉의 골 골을 메아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노루목, 여기가 바로 억조 창생이 봉대하는 은혜의 핵이 터진 터이다. 그 은혜 아니었다면 어찌 우치한 이 중생이 사중은혜 입고 살아가는 지나 알았겠는가. 어찌 다행 대도회상 만나 이런 기쁨 누리겠는가. 연녹색 새잎으로 단장한 느티나무는 말이 없건마는 그때 그 당시 개벽의 환희를 전하려는 듯 한층 더 싱그러움으로 다가온다.

대각의 함성
 방언답 한가운데 「보은강」갈대 숲에 앉아 삼밭재 너머로 기울어지는 해를 바라다본다. 찌르레기들이 갈대 사이를 오가며 보금자리를 트는 소리가 사람 발자국 마냥 들여온다. 산자락마다 땅거미가 드리우고 서서히 밤이 찾아오고 있다.
 대종사님의 대각의 함성을 들어 보려나는 듯 깊은 상념 속에 보은강둑을 거니는 수도자의 조용한 발걸음이 보인다. 한발 또 한발에 뭉치고 서린 서원일념, 옥녀봉 자락이 보은 강에 길게 드러눕는다.
 내 이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대종사님의 대각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면, 구인선진님들의 창립정신을 체받을 수 없다면, 내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멀리 서 점점 가까이 대종사님의 구인선진님들이 방언 막던 힘찬 함성도 들려온다. 구인선진님들의 방언 막던 힘찬 함성도 들여온다. 방언역사의 현장을 가슴 깊이 부둥켜안고 언 답을 휘달린다. 일제의 질곡 하에서 3.1만세 운동 당시 「개벽의 상두소리니 어서 방언마치고 기도하자」시던 말씀은 무엇이던가. 경제적인 안정을 얻고 정신세력을 확장하여 장차 세계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의 진원지가 될 소중한 터 일굼의 말씀이 아닌가.
 터 울림이 점점 요란해지면서 영산 궁촌벽지에서 울린 개벽의 함성이 동으로, 서로, 남으로, 저 북녘 끝까지 메아리친다.
 어느덧 밤은 으슥해지고 발길 머문 곳은 대종사님의 대도정법이 태양과 달처럼 무궁한 세월에 다함이 없이 모든 중생을 고해에서 낙원으로 인도하고 교단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하는 「만고일월」비 앞이었다.
 두손 모으고 간절히 대종사님의 응답을 기다려 본다.
 지금 우리 교단 정신이자 장차 오는 세상을 이끌고 갈 기본정신인 저축조합의 이소성대 정신이 , 구인선진님들의 사무여한 정신이, 방언역사의 일심합력 정신이 우리의 가슴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나이까? 과연 이 땅위에 그 정신을 실현키 위해 얼마만큼 전 재가ㆍ추락교도가 노력하며 개벽의 일꾼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나이까?
 님이시여! 우리 어둡고 어린 마음을 거두어 주소서! 개벽의 활짝 열린 가슴으로 온 생령을 맞이하게 하소서! 아직은 홀로 가기엔 힘겹기에 걸음걸음 님의 큰 뜻 새겨 한때도 님의 곁을 떠나 살지 않게 하시고, 때때로 순경ㆍ역경 주시어 연약함이 없게 하소서!
 하여, 물욕에 충만한 이 세상에 한점 빛이 되게 하시어 어둠을 사르는 영겁 법자 되게 하소서!
 진정 님의 개벽의 환희 앞에 찬탄과 고개만 숙이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떨쳐 일어나 개벽의 함성을 전하는 개벽의 일꾼이게 하소서!
 궁촌벽지에서 고생하는 촌로의 얼굴에서나, 십몇 만원자리 임금 받고 지하공장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직공이나, 새벽 한시에 일어나 쓰레기 더미와 싸우는 청소원 아저씨나, 회전의자를 굴리는 양반이나 간에 육도 사생이 다 같이 질곡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무상낙지에서 공존 공영하는 원만한 개벽의 새날을 어서 맞이하게 하소서!
【이도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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