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내가 만일 이 공부하는 것을 몰랐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하고 가끔 생각해 본다.
 이 법공부는 영생을 두고 해야하는 것임을 알게 된 지금, 다행하고 행복한 마음에 느긋한 미소를 짓게 된다. 가끔씩 과거를 되새김질하면 안도와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푸근한 마음으로 법공부를 법대로 하는 기쁨 속에 있다.
 나의 이 신앙체험이 얼마나 올바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입교 이후 지금까지 나의 신앙생활의 기록을 발췌하여 본다.
 입교 및 신심기르기(1)
 원기 62년 34살때 초여름이었다. 포항 나의 집에 갑자기 환한 빛이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먼발치로만 보아온 검정치마 흰저고리의 교무님들이 방문했다. 나에게는 낯선 장면이긴 했으나 어쩐지 마음은 즐거웠다.
 당시 대구교구장님이셨던 성타원 이성신 종사님께서 마치 집안 조카 대하듯 스스럼 없이 입교했어? 입교해하라는 말씀에 입교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전혀 의사를 묻거나 권유하는 일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나의 영생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것이다. 종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그해 울산으로 직장을 옮겨서도 처음에는 교당을 놀이삼아서 가끔씩 가보았을 뿐 신앙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교무님의 배려로 나의 마음에 철이 들기 시작했다. 교무님의 권유와 가르침에 따라 상시일기, 좌선 등을 따라하면서 나의 신앙생활은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이 갖고있는 극적인 발심없이, 그것도 30대 중반에야 늦깍이로 입교하고 신앙을 갖게 된 나로서는 나름대로 신앙을 위한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원불교를 알아야 되고, 신심있는 사람들의 흉내도 내야 되었으니 바빴다. 다행히도 울산교당에는 교당생활에 모범인 원로교도들이 많아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혼자 눈치 빠르게 배우고 흉내내고, 교전은 독공으로 읽었지만 그렇게도 기억이 안되었다. 공부길도 몰랐고, 실행보다는 머리로만 공부하려고만 하니 어렵기만 했다. 해외출장이나 부모님을 뵙는 일이 아니면 교당에는 기를 쓰고 나갔다. 출장때는 비행기 안에서 교전을 읽는등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또 했다. 한때는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 계문조차 지키기 어려운 판에 공부는 무슨 공부?하는 자학심조차 생겨 괴롭기도 했으나 한 번 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인데하고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나의 신앙생활은 조건이 매우 좋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교도가 됐고 훌륭한 교도여서 우리 부부는 원불교 일에는 늘 의견일치해 둘이 같이 교당으로, 총부로, 영산으로 함께 다녔다.
 또 교무님께서는 나의 신심을 키워주고, 선연을 맺어주려고 온갖 애를 써주셨다. 8월 한더위에 냉방도 안된 차를 타고 대산종법사님을 찾아 뵙던 일, 성지참배하는 법 등을 가르쳐주면서 신심을 길러주었다.
 그러나 공부는 한다고 했지만 늘 자신없는 실행력 때문에 퇴굴심이 났다. 그 퇴굴심을 떨쳐내고 무언가 길을 찾기 위해 총부를 찾아갔고 종법사님의 성안을 뵙고 오는 것으로 마음의 힘을 얻곤 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내가 마음으로 승복한 일은 내가 책임을 져야하는 성격이라, 일단 입교를 한 이상 어떤 일이 있어도 원불교는 나의 종교라는 믿음이 있었다.
경기인천교구 교의회의장이천교당 교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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