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과 「자연」의 삶
청렴결백, 시종일관으로 자선기관
수계농원보존 육성에 정책적인 지원 긴요

 어릴 적부터 참다운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 원불교를 만나 마음둘 곳을 정한 후 출가를 단행, 서울보화원, 용신ㆍ서귀포영광교당 등의 교화현장을 거쳐 다시 자선기관인 이리자선원에 봉직하면서 금년부터 과도기에 처해 있는 수계농원도 책임지게 되어 자선ㆍ교화ㆍ산업현장을 두루 봉직하며, 언제나 성실과 자연9진리) 그대로의 삶으로 교단을 지켜온 염산 이수오 교무님(60세).
 -먼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신 입교와 출가 동기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저의 고향은 고창군 무장면입니다. 어려서부터 참다운 인생을 살기 위한 무엇인가의 갈구가 있었는데, 국민학교 4학년 때 고창선운사로 소풍을 갔다가 스님 한 분이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기를 「부처님이 세상에서 제일 존귀하고 높은 분이라」는 설명을 듣고, 「왜 부처님은 높고, 우리는 높이 되지 못하는가」하는 의심이 걸리면서 인생과 우주대자연에 대한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 뒤로 구도하기 위하여 이인 이나 절간 등을 찾아 전전긍긍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장성에 있는 백양 사를 갈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영광에 살며, 당시 불법연구회 도양지부에 다니던 누님(이양정화)이 구도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불교정전」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 날 밤샘하여 「불교정전」을 일독하고 감동되는 바가 커 영광에 있는 불법연구회를 찾아갔습니다.
 다음해 19세 되던 원기 32년에 도양 교당에서 입교를 하였고, 그 해 여름에 출가를 단행하여 영산학원생을 거쳐 연산부원으로 전무출신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 자선원에 5년째 재직 중이신 데, 자선 원에 대한 소개와 운영실태 등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현재 자선 원에는 1백 30여명이 한가족처럼 살고 있습니다. 개원 초기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나 생활지도상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몇년동안 임직원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하다보니 현재는 자율적으로 질서가 잡혀있습니다.
 자선 원의 재정적 운영은 국가보조가 80%이고, 교단의 보조가 20%로 운영되고있습니다. 교단 보조 20%는 청운 회와 특지가, 각 교당에서 지원해주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자선원 식구들의 하루일과는 원불교인의 하루 일과에 따라서 아침에는 좌선을 하고 낮에는 원예, 소, 돼지, 토끼, 오리 등을 기르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메리야스박스 접기 등으로 보은 봉공을 하고, 밤에는 염불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매주 법회와 4축 2재, 제사 등을 모시는 일로 지방교당 못지 않게 교화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수계농원은 대종사님께서 터를 정해주시고, 정산종사님께서 은산 재단을 형성 발전시켜 영육쌍정ㆍ이사병행의 산 교육장으로써 교단인재 배출의 현장으로 그 역할을 다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금년부터 수계농원장을 겸하게 되셨는데 현재 7만여평의 부지 중 3만여 평이 전주공단 부지로 편입되고 나머지는 신시가지 건설 계획 하에 있다고 들었는데 농원의 실정과 계획 등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지요.
 ▲금년 초에 부임하여 아직은 뚜렷한 종합계획을 말할 수는 없지만 아시다시피 공단조성 계획으로 그동안 전임자들이 애서 가꿔오고 수립했던 계획을 이곳에다 실현하기는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교단의 정책적인 합의가 있어야겠지만 대산종법사님께서는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길이 보존발전 시키도록 당부하시며, 금 만경 지구에 대단위 농장을 형성하여 교단의 산업교화의 현장으로써 인재양성과 함께 대 훈련장으로 유지발전 시키기를 염원하며 계획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있기 때문에 현재의 수계농원 사정은 과도기적 상태로 어떠한 일을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따라서 관망하면서 수지가 맞지 않는 축산 부문은 거의 정리단계에 와 있고, 밭농사는 땅콩 생각 등을 주로 재배하였으나 현 우리농촌 현실로는 수지를 맞추기엔 기대하기 어렵고, 1백20두락 정도 되는 논농사 때문에 수계농원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용신ㆍ서귀포ㆍ영광교당 등에서 교화도 하셨는데 교화 현장에서의 일도 소개해 주시죠.
 ▲용신교당은 1년 정도밖에 근무를 못했고, 처음 교화에 임한 곳이기에 교화감각을 익히는데 주력했습니다.
 서귀포에서는 5년을 살았는데 초창이라서 두어해 동안은 어려움이 많았지만 차츰 교화가 호전되어 군산교당 후원으로 도순 교당을 신설하는 등 제구교화의 활로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영광에서는 8년을 지냈는데 교화선상에 임하면서 유치원과 신협을 운영해보고자 했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용신이나 서귀포서는 여건이 안되었는데 영광에서는 적당한 인물이 있어서 손쉽게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광에 부임하여 교화의 불을 일으키기 위해 밤낮으로 마을회관을 이용해서 마을 법회를 봤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자선ㆍ교화ㆍ산업교화현장을 두루 경험하면서 일생을 살아오셨는데 일생을 지켜온 좌우명과 후진들에게 신앙 수행의 지표가 될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먼저 자선기관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자선기관에 임하고자 하는 후진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서울보화원에 발령을 받고, 부임 전에 대산종법사님께 「어째하면 잘 살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으니 「들어갈 때 입은 옷을 나올 때도 입고 나오라」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저는 물질ㆍ전신간에 청렴결백하게 사심 없이 살고, 시종일관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으로 받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청렴결백하고 시종일관한다면 성공적인 삶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좌우명은 「일원대도인, 일원봉공인」을 표준삼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성실」은 전무출신의 도 12조의 천지 행을 한다는 심경으로 사는 것이고, 「자연」은 전무출신의 도 1조인 일체 중생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고, 전체행복이 나의 행복이란 이상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 심경으로 살아간다면 언제 어디서든 전무출신의 본분을 여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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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염산원장님은 자선 원의 유지발전과 수계농원의 종합개발 계획을 구상하시면서, 개인적으로는 자연에 맡기는 심정으로 아침 좌선 후 전무출신의 도를 음미하시는 재미로 살아가신다.
【이도전 기자】

<이리자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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