深思 ㆍ 여유 ㆍ 음덕의 법문

한증막을 방불케 했던 한 여름의 불볕 더위도 이제는 한결 가시고 9월 초가을의 新凉이 언덕을 넘어서 산드러운 자락을 펴기 시작하였다. 아직 한 가을이기에는 못다한 여름의 사연들이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여기 저기 흩어져 남은 열기를 씻어가고 잇는 중이지만 그런대로 더위를 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여간 고맙고 후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입추와 처서를 보내고 난 요즈음이니 가을은 가을인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더위 때문에 시달리고 어수선했던 심신과 생활 환경을 어느듯 정제하고 그리고 차츰 저마다의 인생, 그 자성의 문안으로 깊숙이 들어서서 조용히 조용히 사유하는 자신의 얼굴과 그 진지한 자체를 가꾸어내는 것도 이 가을의 문턱에서 부여받은 뜻있는 작업일 것이다. 그 언제 그 어디에서나 끊임이 없고 다함이 없는 우리네 인생수업이 어찌 이 가을에만 한 하랴만은 가을의 대기속에 흐르는 한 줄기 청량의 소리가 이 한조각의 마음을 부르는 것은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리라. 그래서 이 가을에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몇자의 문자가 있다.
「深思 ㆍ 여유 ㆍ 음덕」이 그것이다. 이 문자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다지 낯선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 구절 법문은 대산종법사께서 자주 하시는 편이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 교단 지도자로서는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의 기틀이라고 지난 8월14일 교단간부 훈련 해제식에서 천명해 주시기도 했다.
지도자니 지도자의 인격이니 하여 지도자상을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도 되는데 오늘날에 있어서 지도자는 지도자 수난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도 한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로서의 부권이 상실된 채 그 집에서 부지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맥락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가정에서 부권이 엄존하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한 권위있는 조사결과에서 밝혀졌다. 우리네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치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륜이 기울어져 가는 판국에서야 그 무엇인들 어느 위치인들 온전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지도자인들 또 그 누구인들 어떻게 무엇을 지탱해내겠는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고 누구에게 있는 간에 이를 일러서 이른바 「부조리」의 현상이라 할 수 박에는 없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해결될 수도 없는 혼돈의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바르게 알고 슬기롭게 대처하여 이를 극복하고 이 혼돈의 늪을 넘어서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궁극적인 양심의 방향이라 할 것이다.
이제 한걸음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여기에서 지도자는 누구이고 피지도자는 누구이겠는가ㆍ 더더구나 아버지는 누구이고 그 자식들은 또한 과연 그 누구이겠는가. 우리들은 누구이겠는가. 그 누구가 한시인들 갈라 놓고서는 살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네의 관계를 이렇듯 갈라 놓고 여기에 엄청난 혼돈의 늪을 파놓고 이 늪에 스스로 빠져들게 하여 언제까지나 헤어나지를 못하게 하였는가.
이제 우리들은 저마다 속속들이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단절의 이 아픔이 누구의 아픔이고 먼저 우리들 자신은 어떠한가를. 가정에 있어서 직장에 있어서 사회에 있어서 나라에 있어서 또는 교단에 있어서 우리들은 진정 하나인가를. 하나되는 삶으로 하나되는 뜻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무엇이 들어서 우리들을 갈라 놓고 있는가, 가정 나라를 갈라 놓고 교단을 갈라 놓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째서 그러는가를 분명히 알아내고 찾아내야 할 것이다. 저 헤어날 수 없는 부조리, 그 혼돈의 늪이 생기게 되는 이 스산한 마음자리의 空洞으로부터 원천적으로 다스려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深思, 여유, 음덕으로 먼저 사람된 본연의 기상을 정립하여 자기의 주체와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참 모습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가을 한줄기 맑은 바람결에 하나씩 하나씩 우리들의 매듭을 풀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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