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교당
어린이 신앙고취에 유아원 교사 역할 중요
교화 ㆍ 교육 유지 3대사업 전개로 교당 운영
일반 성지순례 효도법회는 연례행사
교화활성화 위해 단독교무 체제지양
지역특성과 법의 기연

논산으로부터 서쪽으로 8km 떨어진 이곳 강경은 일찍이 금강 하류에 발달한 하항도시로 평양, 대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시장의 하나로 이름이 높던 고장이며 천주교가 처음 이 나라에 들어온 남바우 성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더욱 강을 이용 선박이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어 이 지역의 곡물과 타 지역의 특산물 등이 이곳을 통해 유통되어 넓은 지역을 확보하였으나 1889년 군산항이 개항장이 되고 경부선, 군산선, 호남선과 고속도로의 개통에 따라 육로를 통해 유통됨으로 강경은 하항도시 ㆍ 상업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어 점점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경의 공원인 옥녀봉 밑에 자리 잡은 강경교당은 이 지역 중에 아름다운 장소로 이름난 곳, 교당에 들어서는 사람들마다 깊은 산속의 별장을 찾아든 것과 같아 세속의 흩어진 마음이 저절로 녹아지는 듯한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당 뒷마당에는 연못이 있으며 그 뒤쪽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을 이용하여 정자와 석탑이 세워져 자연의 오묘함을 한층 더 해주고 있으며 정자에 오르면 한눈에 강경읍내를 바라볼 수 있어 누구나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이곳 강경에 일원의 법음이 울려 퍼지는 원기 34년 당시 이리교당 박영종씨의 연원으로 입교한 백관선씨(현 영등교당)가 원기 41년 강경으로 이주해 교당 설립의 뜻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원기 52년 백관선씨와 당시 이리교당 이정은 교무가 이곳에 교당을 설립할 것을 약속하고 내적으로 기초를 쌓기 시작하여 53년 11월 김영신 법사와 이정은 교무를 초청 일원대도의 첫 법문을 소개함으로써 비로소 교화의 장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백관선씨의 자택에서 월2회(3일,17일) 이리교당 연원으로 출장법회를 실시, 원기 54년 4월 강경 출장소로 정식 인가를 얻었다. 출장소로 인가되면서 법당 마련의 시급함을 느끼게 되어 백관선씨의 발원과 교도들의 협조로 원기 55년 3월에 강경읍 대홍동 2번지에  대지 2백18평 건평 32평의 와가 1동을 1백만원에 매입 교화의 새로운 기연이 도래하였다. 따라서 매입한 건물의 보수를 요하던 차에 임장수화씨의 특별 희사로 공사에 착수 하였다. 이 공사 기간중 공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최선하, 백관선씨의 부부는 몸소 감역과 노동력을 동원하고 월급을 공사비에 진력하는등 영생의 진로를 열어주는 법 도량을 장만하는 일념으로 온갖 수고로움을 잊은 법열 속에서 공사를 완성하였다.
건물이 완성된 원기 55년 4월 강경선교소로 승격함과 동시에 초대 송순봉 교무가 부임했다. 그러나 법당은 마련되었으나 종교의식에 필요한 도구가 갖추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법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동년 6월 이리교당 윤성규, 김성윤씨의 특별희사로 성가 보급을 위한 오르간을 비롯 모든 교도의 정성을 보아 불구를 구입하여 제반행사에 만전을 기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화가 활성화 되어 법음이 울러 퍼지자 법회장소의 협소함을 느끼고 교도들은 법당확장을 결의 모든 교도가 근검절약하여 교당 확장에 착수, 2개월의 공사 끝에 완성 되었다.
도량확장과 교화
법당 시설이 확장됨에 따라 학생교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생의 조직을 목적으로 학생훈련을 실시해 오던 차 동년 9월 첫 창립법회를 가짐으로써 학생회의 출범이 이루어졌다. 그 이듬해 2월 어린이회를 조직하여 어린이회 학생회의 교화에 서서히 힘을 쏟기 시작하여 동년 12월 학생회 주최로 수재의연금 모집 학생교리훈련, 읍내 역전광장 조기청소 등의 실시로 학생회의 내실과 지역사회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일반교화도 정상괘도에 들어 원기 57년 김중묵 법사를 초청 첫 교리 강습회를 실시하여 평균 1백30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고 동년 3월 16일 회장단, 주무, 단장, 중앙 등이 모여 연석회의 갖고 교도  상호간의 친목과 교화 ㆍ 봉사를 목적으로 한 봉공회의를 조직하여 더욱 화기애애한 교당 풍토를 조성하게 되었다.
원기 58년 4월 총부 인사 발령에 따라 김지선 교무가 부임하여 5월부터는 매월15일(음) 저녁으로 보은미 헌납 보은기도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기도시간에 교전공부와 성가지도를 실시했다. 또한 옛 교도 찾기의 일환으로 학생들이 졸업 후 떠나기 쉬운 교당을 연결하는 경운회(학생회 출신의 모임)를  동년 8월 조직함으로써 강경교당 선후배의 윤기와 전국 어느 곳에 가든지 원불교를 잊지 않고 찾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봉공회의 범위를 넓혀 교도 상호간의 애경사에 관한 일체 행사를 봉공회에서 담당하여 지역사람들에게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원기 62년 5월 인사이동에 따라 김지선 교무가 떠나고 이덕조 교무가 부임, 교리와 신앙심을 돈독히 하게하는 일환으로 그동안 보은미기원식을 음력 15일로 진행한 것이 지역사정에 의해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안타깝게 생각한 이 교무는 매월 마지막 일요일로 옮겨 실시하면서 전교도가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강조 하였다.
교당 모임이 점차 많아지며 교통량의 증가로 도로변에 위치한 교당이 소음으로 건물의 진동이 심하여 법회 및 모임을 갖기가 어렵게 됨에 따라 다른 장소로 교당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여러 곳을 물색 하던 차 북옥동 1백54번지(현 소재지)가 물색되어 대흥동 건물을 매각하고 북옥동 대지 5백80평 건평 90평을 매입했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 강경 제일 부호가 지은 집으로써 터가 좋아 불상을 모셔놓고 스님을 초청하여 불공을 올리기도 한 곳, 주인이 여러번 바뀌는 바람에 관리 소홀로 보수할 곳이 많아 2개월에 걸쳐 보수 및 법당을 새로 건축하고 원기 63년 7월 봉불식을 가졌다.
새 법당이 마련됨과 동시에 어린이회서부터 일반에 이르기까지 교화의 활성화기 되기 시작하여 어린이 여름학교 개설과 학생 교리훈련, 일반 성지순례 등이 연례행사로 진행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초창요인으로 교당의 일에 솔선수범하여 오던 백관선씨가 원기 64년 이리로 이사함으로 교당의 운영에 먹구름이 띠기 시작하였다. 소수의 교도로써 교당이 운영되어온 문제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교무는 교화 ㆍ 교육 유지의 3대사업을 벌이기 시작하고 모든 교도들이 주인정신을 발휘, 서서히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원기 66년 8월 원심회(30~40세의 교도모임)를 조직 교도의 모범과 원불교의 주인이 되어 서로 법형제의 우의로써 공부 ㆍ 사업을 권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생 청년회에서는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교도님들을 모시고 효도법회를 진행 일반에서 어린이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한 가족 잔치를 베풀며 앞에서 이끌어 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모범적인 원불교인상을 지역에 보여 주기도 했다.
지역사회로 발을 돌린 동 교당은 요인회에서 유아원 설립을 결정,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초창 당시 원불교 근본정신인 근검절약 일심합력 정신을 발휘, 12인승 미니버스를 구입하기 위해 3백만원짜리 적금을 들기 시작하였다. 원기 67년 9월 첫 유아원생 30명을 모집, 법당에서 원생을 지도해 오다 동년 11월 30여평의 유아원 교실을 완공하고 놀이터 및 버스, 어린이 교구등을 구입하여 유아원의 규모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원기 68년 1월 정식으로 새마을 유아원 인가를 얻어 새 학기에 70명을 모집 원생을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새마을 유아원이지만 아직 행정 당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일요일에는 교도님들이 유아원 버스를 이용 교당에 나오고 있다.
이덕조 교무는 유아원 운영에서부터 일반까지 교무 혼자 교화하다보니 자연 손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며 특히 유아원 교사들의 신앙심이 어린이 신앙교육에 큰 역할을 하는데 아직 교도인 교사가 없어 큰 걱정이다고 고충을 털어 놓는다. 총부 당국에서 교사 채용에 많은 협조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유아원을 이용 자모 및 이곳 일대에 새로운 원불교상을 부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온 교도가 뜻을 모으고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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