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타원 정량선 정사
희산 오철환 대호법
丁正師 53개성상 교화 ㆍ 자선계 등에서 봉직
교화사업에 크게 공헌한 거진출진 吳大護法
덕타원 정사

수위단원인 덕타원 장량선 정사(73세)가 지난 29일 오후 8시 40분경 익산수도원(이리시 신룡동)에서 숙환으로 열반했다. 법납은 53년.
故 덕타원 정사의 법위는 정식법강항마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준특등에 해당되어 중앙총부 소관회의에서는 덕타원 정사의 장례절차를 교회연합장으로 시행키로 결의하고 장의위원회를 구성, 지난 31일 오후 2시 중앙총부 기념관에서 발인식을 거행했다. 장지는 왕궁 영모묘원.
이날 발인식은 김윤중 장의위원장의 개식사에 이어 약력보고, 착복 및 고유문낭독, 출가대표 고사(정진숙 법사 봉독), 재가교도대표 고사(나철중 법사 봉독), 독경 및 축원문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어 대산 종법사의 법문(황직평 법무실장 대독)이 있었다.
대산 종법사는 『어린 나이에 대종사님과 숙겁에 약조한 기연 따라 출가하시어 올린 신서오가 서원은 수십성상 동안 못난 듯 어리석은 듯한 器局으로 숨어서 일관하신 생애로 새로운 성자상을 후인들에게 사표로 남기셨으니 이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영천영지 그 공덕을 같이 할 것』이라고 법문하고 『초창기 가난한 교단 형편 따라 공장으로, 식당으로, 논으로, 밭으로, 이 기관 저 기관, 이 교당 저 교당으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살아서 오로지 爲公忘私 爲法忘軀를 다하셨으며, 출가 그날부터 열반 그날까지 미움도 고움도, 옳음도 그름도, 친함도 멀리함도, 착함도 악함도, 너도 나도 떠난 마음으로 불리자성의 그 심법을 여여히 일관하셨다.』고 고인의 영생을 회고했다.
대산 종법사는 또한 덕타원 정사의 영전에 『초창 창립기에 바치신 그 신심 靈界에 편히 쉬시었다가 오실 때에는 「大德은 必得其位하고 必得其祿하며 必得其名하고 必得其壽 한다.」(큰 덕은 반드시 그 위를 얻고 반드시 그 녹을 얻으며 반드시 그 이름을 얻고 반드시 그 수를 얻는다)는 옛 성인 말씀 따라 내내세세에 그 큰 덕을 갖출 것』을 부촉했다.
故 덕타원 정사는 1914년 7월 4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출생하여 원기 9년 모친(안타원 김동수)의 연원으로 입교했으며, 원기 17년 총부를 방문, 대종사님을 친견하고 원기 19년 4월 출가했다. 출가 이후 총부 공양원으로 전무출신의 길을 출발하여 대종사님의 호념 속에서 2년의 생활을 지내고 지방교무로서 일제의 압박을 겪으면서도 교화의 보람과 인재를 배출시키는 보람 등과, 동래수양원에서 20여년을 노인복지를 위해 헌신하는 등 초기 교단의 교화계와 자선계에서 일생을 봉직해 왔다.
원기 39년 4월 「덕타원」이란 법호를 받았으며, 원기 53년 3월 수위단원에 피선되었다.
원기 60년 고혈압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원기 68년 50년의 교단공직을 놓고 정년퇴임 하여 익산수도원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투병 중에도 봉사와 수행에 정진하다 지난 29일 오후 7시 73세의 일기로 열반에 드신 것이다.
◇덕타원 정사 약력
△원기 9년 입교 △同19년 출가 △同19년부터 중앙총부 ㆍ 서울교당 공양원 역임 △同22년부터 서울교당 서기, 원평교당 순교, 남원교당 보교역임 △同26년부터 수지교당 교무, 진영교당 교무 역임 △同39년 4월 법호 증여 △同48년부터 동래수양원 교무 역임 △同53년 3월 수위단원 피선 △同56년부터 동래수양원 교감 및 원장 등을 역임.
희산 대호법
희산 오철환 대호법(75 ㆍ 교화사업회 회장)이 지난 29일 새벽 4시경 군산 자택에서 숙환으로 열반했다.
중앙총부 소관회의에서는 故 희산 대호법의 장례절차를 교회전체장으로 거행키로 결의, 장의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난 31일 11시 군산시 경장동에 위치한 채전약품 희산회사에서 발인식을 거행했다.
故 희산 대호법은 법위 정식법강항마위, 사업성적 정특등으로 원성적 정특등에 해당된다. 법랍은 34년. 장지는 옥구군 성산면 성덕리 선영에 안장했다.
대산 종법사는 이날 발인식에 앞서 법문을 내렸다. 재고교도로서는 처음으로 거행된 전체장  발인식을 김윤중 장의위원장의 개식사에 이어, 약력보고, 착복 및 고유문낭독, 교단대표 고사(정도진 중앙교의회 의장 봉독), 유족대표 고사 등의 순으로 거행되었다.
대산 종법사는 『교단의 큰 기둥이 무너진 듯, 큰 보배를 잃은 듯 가슴 허전함과 애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애도하고『희산 정사는 거진출진으로서 진흙속의 연꽃처럼 보살도를 닦아 대호법의 성위에 오르는 공부와 사업을 두루 바르게 베풀었음으로써 항상 천록을 수용하고 천복을 받았으며, 어려운 교단경제에 몸소 무념 ㆍ 무상행의 불사를 주저하지 아니하여 교화사업회를 밑받침 하였으니 앞으로 백 ㆍ 천의 교당이 세워질 그 곳이 모두 희산이 되어 일원의 법화가 만발할 것』이라고 고인의 일생의 공덕을 기렸다.
대산 종법사는 또한 『희산 정사는 모든 사람의 표본이 되고 귀감이 되는 중인의 스승이며 어버이였으며, 해탈자재의 대 정진은 시방을 불곡정토로 건설하고 무념무상의 대 공덕은 이 세계를 일원의 희산으로 만들 것』이라고 범문하고, 『희산 정사는 일원의 원만한 진리를 깨쳤고 사은의 원만한 신앙으로 봉공하였으며 삼학의 원만한 수행으로 몸소 실행하였고 사요의 원만한 수행으로 치국평천하를 실천하다 가셨으니 돌아오는 세상에는 大佛果 ㆍ 大佛果 ㆍ 大佛果를 뜻대로 이루시로다.』라는 법구로써 영로를 위로했다.
희산 대호법은 1912년 3월 10일 전북임실군 임실면 신안리 4백65번지에서 출생하여 원기 38년 5월 홍정관씨(現중앙교의회 부의장)의 연원으로 군산교당에서 입교, 원기 40년 4월 군산교당 교도회장에 피선되었다.
원기 46년 「희산」이라는 법호를 받고, 원기 59년 교화사업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원기 60년 「대호법」의 법훈을 증여받는 한편, 원기 62년에는 이리교구 교의회의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희산 대호법은 군산 로터리클럽 회장 등 사회적으로도 중책을 맡아왔다.
희산 대호법은 남다르게 선각하여 직업을 택할 때도 모든 인간의 병든 육신을 구하는 약업(태전약업사)을 택하여 사회에 봉사해 왔고, 장년에 이르러서는 일원의 진리를 깨쳐 마음병속으로 인도하였다.
희산 대호법은 평소에 『무엇보다도 흐뭇하고 기쁜 것은 개척한 교당이 잘될 때이며, 국내에 1천개 교당의 설립이 과업』이라 말해왔으며 『우리가 이 회상을 만나 공도 사업하는 것이 참으로 기쁘고 다행한 일』이라고 말해왔다.
희산 대호법은 슬하에 3남5여를 두었으며 장남인 오광천 씨는 선친의 뒤를 이어 태전약업사 회장직을 승계하고 군산교당 교도회장에 최근 피선되었다.
◇희산 대호법 약력
△1912년 3월 10일 전북 임실군 임실면 신안리 4백65번지에서 출생 △1931년 도일 △1937년 귀국 및 태전약업사 창업 △원기 38년 5월 군산교당에서 입교 △同40년 군산교당 교도회장 피선 △同46년 「희산」법호 증여 △同59년 교화사업회 회장 피선 △同62년 이리교구 교의회 의장 피선 △군산 로터리 클럽 회장, 오씨 대동종친회 회장 역임 △내무부장관 ㆍ 재무부장관 ㆍ 국세청장 표창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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