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정 석<법사 ㆍ 원광대교수>
불합리한 제도개혁, 사회를 발전
종교 및 민족의 대화합윤리 실천

○…  다음 글은 교립 원광대부설 원불교  …○
○…  사상연구원이 10일 서울회관에서    …○
○…  개최한 제6회 학술회의 때 한정석   …○
○…  (원광대학교)가 발표한 내용을 간   …○
○…  추린 것임.            [편집자 주] …○
원불교는 1916년에 창건되어 70년이 역사를 거쳐 왔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몇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 환경의 면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고 인간의 의식구조도 많이 달라졌다.
20세기의 한국사회는 몇 백 년 동안 고질화된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외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체정비에 있어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였고, 그리하여 사회제도의 혼란, 의식구조의 갈등, 산업화의 불균형, 문화수준의 격차 등이 나타났다.
종교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의 면에서 한국사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야 하며 더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면에서 한국사회의 미래상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未開성은 일단 합리성으로 극복하여야 하지만 합리성의 폐단은 초합리성으로 극복해야 되는 것이 오늘의 종교가 할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불교는 한국사회의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며 앞으로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를 몇 가지로 밝혀본다.
불합리한 제도개혁
지금까지의 정치 ㆍ 경제의 사회제도의 역사를 보면 강자와 약자와의 대립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정치적인 권력과 억눌림, 경제적인 致富와 가난함의 싸움이었다. 강자는 폭력과 권모술수로 약자를 억압해왔고 약자는 대항과 자학으로 시달려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회균등과 공정분배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사호갈등의 틈 속에서 전체주의라는 폭력이 또 다른 집단적 강자가 되어 약자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대종사는 「강자는 약자에게 자리이타로 약자를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이며, 약자는 강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여 가는 것이 다시없는 강자가 되는 길이다」라 하였다.
자리이타란 나도 이로우면서 남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는 이의 실현이 어렵게 된다. 여기에 강자에 있어서 인간 본래의 공에 바탕한 뼈저린 각성이 요청된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의 입장을 고집하면 서로가 근시안적이 되고 만다. 먼 옛날을 꿰뚫어 보면서 자체를 정상화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 이를 강자와 약자와의 조화의 원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종교는 조화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 조화가 다분히 강자의 편에서는 조화일 수도 있었다. 원불교도 조화를 강조한다. 앞으로의 조화는 약자를 보호하는 방향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의 교조가 약자의 편에 서서 괴로워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리이타를 「나의 이익을 너의 이익으로 연결시킨다.」로 해석해 본다.
민주적 인격을 형성
자유와 평등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사회제도의 개혁은 계속되어 왔고 오늘날도 요구되고 있다. 어떠한 면에서 보면 개인이 어떻게 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보다는 선한 사람이 자유와 평등의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제도가 중요한 문제이다. 서구 근세사회에서는 이러한 면에 역점을 두어왔던 것이다.
법을 지켜 손해 보는 사회가 아니 되어야 한다. 지도층이 준법의 모범을 보여야한다. 법의지배를 내세워 법을 악용함을 경계해야 한다. 「사법권이 독립 안 되면 법에 대한 불신이 심화된다.」고 어느 법학자는 「법의 날」에 주장하였다.(동아일보 1986년 5월 2일자) 이는 법에 관한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이렇게 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람직한 사회제도로 개벽하자는 주장이나 제도를 운영하고 지켜나가는 입장이 모두가 사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제도적인 개벽과 아울러 어느 입장이거나 간에 보다 심화된 자유 평등의 민주적 인격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인권은 외적인 제도에서도 보장을 받아야 하지만 내적인 자체 정신력에서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자신과 사회를 망치는 근본요인은 사욕이었다. 불같이 일어나는 사용을 얼마만큼 극복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민주적 인격이다. 초야에서의 청렴이 크고 작은 권력층에까지 뻗쳐나갈 때 사회도 발전할 것이다.
또한 코앞에 닥치는 이권에 가리어 事體를 보지 말고 보다 영원의 안목에서 자신과 사회의 문제를 판단하는 심화된 통찰력이 민주적 인격이다. 평민의 잘못된 판단은 개인의 멸망에 그치지만 사회의 큰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은 많은 사람과 사회 자체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정의로운 일은 죽기로써 실천하고, 불의한 일은 죽기로써 제거하는 것이 민주적 인격이다. 옳은 일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나 무엇이 정의로운 일이냐가 문제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먼 안목에서 한국사회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유기체사회를 실현
원불교는 1910년대에 한국사회의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저축조합(1917년)운동을 통해서 자립정신을 일으켰고. 방언공사(1918년)를 통해서 개척정신을 일으켰고, 법인기도(1919년)를 통해서 공익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저축조합운동은 자립정신이다. 자립은 정신적인 자각과 경제적인 능력을 뜻한다. 자립하는 정신자각, 자립하는 경제능력, 자립하는 사회발전을 시도한 것이다. 이렇게 자립하는 인간, 자립하는 사회를 이룩하려고 한 것이다. 자립에는 개인적인 자립도 중요하지만 사회 ㆍ 국가적인 발전도 필요하다. 개인이나 사회를 정신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으로 건전하게 발전시키는 것이 원불교의 역할인 것이다.
방언공사는 개척정신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원불교 정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개척의 창조에는 정신적인 창조와 경제적인 개척이 있다. 개척의 창조는 개인적인 면과 사회 ㆍ 국가적인 면이 있다.
이렇게 개척하는 인간, 개척하는 사회를 이룩하려고 한 것이다. 방언공사는 사회공익을 위해서 원불교가 시도한 하나의 창조 작업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척해서 발전시키며 국가 ㆍ 사회를 문화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에서 최대한으로 개척해서 발전시키는 것이 원불교의 역할인 것이다.
법인기도는 공익정신이다. 원불교의 공익정신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행동을 버리고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데 성심성의를 다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공은 일체 중생을 의미한다. 공익에는 모든 사회구성원에 공도에 헌신하는 면과 제도적으로 공도사회를 실현시키는 면이 잇다. 법인기도는 원불교가 공도사회를 실현시키겠다는 종교적 순교 작업이었다. 이렇게 공익 하는 인간, 공익을 존중하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공익에는 개인의 공도헌신도 중요하지만 제도적인 공도사회의 실현은 더욱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익정신을 심어주고 공도사회를 실현시키는 것이 원불교의 역할인 것이다. 이렇게 국가 ㆍ 사회가 자립하고 개척하고 공도하는 유기체적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화합의 윤리실천
오늘의 한국사회를 바로잡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는 종교적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각 종교가 각자의 종교의 교세확장을 목적으로 하여 자기 종교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면 교세의 확장은 될지 모르지만 민족 대화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한국은 매우 어려움 상황에 처해있으며 앞으로도 종교를 비롯한 모든 문제가 심각하게 어려워질 것이다. 남북분단은 정치적 분단의 차원을 넘어서 민족정신의 분열에 이르고 있다. 민족정신의 정상화는 각 종교의 교도운영체적인 비장한 일체감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까운 현실에서도 일부일망정 종교 간의 배타성은 심각한 문제이다. 모든 종교가 힘을 합쳐도 오늘의 한국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은 종교의 힘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함에도 각 종교는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적 종교를 타력적인 啓示종교라 하고 동양적 종교를 자력적인 覺의 종교가 하여 그 특색을 강조한다. 계시종교가 우주만유의 본원을 중시한다면 각의 종교는 제불제성의 심인을 중시한다. 계시종교도 각의 세계를 이해하려 하고 있고 각의 종교도 계시신앙의 강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원불교의 최고 宗旨인 일원상의 진리를 우주만유의 본원이면서 제불제성의 심인이다. 타력신앙적인 면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윤회와 위력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자력수행적인 면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는 각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원불교 교리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만나게 하는 사명이 있다는 뜻이다. 일원상의 진리는 하나의 진리이다. 하나의 진리는 원불교의 것만은 아니다. 각 종교는 그 교리를 지키면서 근원적인 면과 교조정신에서 만나야 한다.
원불교는 시대적으로 보아 어린 동생이다. 어린 동생일수록 조금 고집이 있는 형들을 웃기면서 화해시킬 수가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원불교가 해야 할 역할 가운데 중요한 일이 종교협력체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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