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년 월일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끌림없는 마음

 오래전 일이다. 앞에 가던 차가 갑자기 서는 바람에 추돌사고가 났다. 그전 같으면 한참을 입씨름해야 될 일이었으나 오늘은 부딪히는 순간에 무착의 심정으로 부짖혔다는 사실만을 끌림없이 그대로 보니 아 부딪혔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왜 그렇게 급정거를 했어요? 앞에 사람이 지나가서요
 그래요 차가 부서졌네요. 이곳으로 연락하세요 하고 명함 한 장 내미니 그것으로 끝났다.
 대종사님의 용심법인 일상수행의 요법대로 본래 없는 자리에서 부딪힘을 보았고, 부딪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니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법에 맞게 사는 것인가. 대종사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으로 또 우리가 닮아가야 될 표준으로 일원상을 내어주셨으니 그 일원상이 우리에게 주시는 표준은 무엇일까? 원만구족 지공무사리라.
 이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진리의 조화는 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알고 모름에 구애받지 않고 일원상은 순간순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작용을 하므로 나투어진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인과는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이왕에 지을 육근작용이라면 복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그래서 대산상사님께서는 이라고 하셨다.
원기년 월일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대조공부
 미국사람이 일본에 처음오면 음식값 때문에 질겁을 한다. 지금 나와 함께 일본에 와 있는 미국친구도 마찬가지 였다. 어제는 저녁도 굶겠다고 한다. 이 친구의 그런 마음을 읽고 잠시나마 낮추어보는 마음이 생겼다. 이제는 거지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못난 마음이었다.
 미국사람은 부자라는 어릴 적의 관념 때문에 내 마음이 바로 그 분별에 주착한 듯 하다. 내가 식사대접을 해야 될 입장이라는 것이 그와 나 사이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인과인 것을 잠시 잊고 그 분별에 착된 것이다. 오늘은 아무런 생각없이 전과 같이 함께 다니고 밥도 먹을 수 있었다. 마음에 대조한 덕이다.

원기년 월일 인과의 원칙, 죄복의 갈림길
 법어를 연마해 보았다. 정전도 연마해보았다. 함은 생각이 용이하나 함은 약간 애매하다. 그러나 간단하게 육근의 작용이 있으면 동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동할 때는 자성을 세우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일상수행의 요법으로 마음대조공부를 하고 있다. 즉 경계를 대하여 분별심을 내지만 그 분별에 착하지 않는 공부를 한 결과 동하여도 분별에 착하지 않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할 때의 공부는 소홀하기 쉬우니 분별없는 정함이 자성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정하되 분별함이 있어 그 분별이 절도에 맞아야 한다. 이것이 대각여래위의 심법이다. 좋고 나쁨이 구별조차 없다면 진리의 원만구족 지공무사함이 있을 수가 없다.
 전에는 일원상법어가 깨친 사람의 육근작용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깨친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중생의 육근작용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대종사님의 가르치신 바를 내맘대로 편집하여 스스로 속아온 것이다. 대종사님께선 일원상의 진리가 우리의 현실에 나투어지는 모습을 원리적으로 해부하여 알려주신 것이다. 즉 육근 작용의 순간순간에 진리는 늘 원만구족하게 인과를 밝혀 지공무사하게 호리도 삿됨이 없이 나투고 있음을 알려주셨다. 내가 깨치면 이 진리를 알게 된다고 하셨다.
경기인천교구 교의회의장ㆍ이천교당 교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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