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개벽과 채널 맞추기
지적 수요 증가 따른 정보수집 중요

 우리가 사는 20세기를 다음세대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흔히 산업사회로 일컬리는 오늘날을 라스키는 전쟁의 시대로, 갈브레이드는 불확정성의 시대로 불렀거니와, 실로 수세기 동안에 일어났음직한 큰 일들이 모아졌다가 한꺼번에 터진 듯한 느낌이다.
 가공할 만한 무기로 죄 없는 시민들을 무참히도 죽여댔다. 그래서 불안의 시대요, 인류 말살까지도 예견되는 공포와 전율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과학의 발달로 지구촌을 이룬 가운데 통치자들은 이 시대의 경험을 잘도 이용했다. 전쟁의 폐허에 사회주의 왕국이 들어섰고, 다시 이데올로기의 전쟁을 몰고 온 다음, 세계를 둘로 갈라놓고 우리 민족의 목을 죄고 있다.
 생각해 보면 토플러의 미래에 나타날 미지의 문화충격과 새로운 물결의 기대나, 토인비의 그래도 꾸준하게 발전해온 역사의 눈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는 격동의 역사가 가르쳐준 소중한 교훈의 소산이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인류애를 발휘할 것인가, 또는 인간을 도구화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전재을 일으키는 방법만을 터득할 것인가. 어느 누구도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믿는 것은 인간의 지혜다.
 인간은 지혜가 있기에, 밤이 깊으면 별이 더욱 영롱해지는 것처럼, 전쟁 속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그러므로 해서 망해버린 세상의 벼랑에서 낭떠러지로 뛰어 들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오탁 악세에 위대한 성자가 출현한다는 정산종사님의 성자 관은 이러한 인간 지혜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제 바로 눈앞에 21세기를 내다보고 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일찍이 없었던 이 격동의 시대를 정리하는 작업이 서둘러져야 한다. 무엇을 축으로 세워야 인간이 평화롭고 인간다웁게 살 수 있는가에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귀중한 이 시대의 역사적 교훈을 또 다시 망각한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 앞에 서서 우리가 주저 없이 소태산 대종사님의 개교법문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다. 물질문명이 인간성을 여지없이 강타한 이 시대에, 민중의 삶을 영위하며 희망과 용기와 보람의 철학을 실천적으로 전개하신 대종사님은 정신개벽을 외침으로 써 인류미래의 방향타를 굳건히 붙잡아 주셨기 때문이다.
 정전의 머리 부분을 장식하는 개교법문은 2백자에 못 미치는 짧은 법문이지만 현대 이후의 인류에게 삶의 바른 좌표를 천명하기에는 충분하다. 첫째 과학이 발달한 오늘은 새 시대요, 둘째 새시대의 물질 사용을 위한 정신세력을 확장해야 하며, 셋째, 그 방법의 하나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요, 넷째 그 둘은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요, 다섯째 그에 의해 인류를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한다는 요지이다. 이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로 집약된다. 정신개벽 없이 인류의 미래는 없으며, 정신개벽을 이룬 인류가 과학문명을 수용할 때 도학과 과학이 골라 맞는 낙원세계가 건설된다.
 정신개벽에 의한 인간주체의 확립이 관건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는 내가 붙잡히면 낭패다. 내가 그 사람을 붙잡아 올리면서 헤엄칠 때 구조가 가능하게 된다. 물에 빠진 사람은 물위로 올라가는 게 본성이므로 붙잡히면 잠수하여 빠져나온 다음, 주체가 되어 건져야 한다. 인간이 물질을 사용할 때의 원리도 이와 같이 않을까.
 앞으로 사회는 고도기술사회, 정보화 사회로 전개되리라 한다. 인간 사회는 더욱더 복잡해질 것이고, 엔트로피 법칙을 설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지적 수요가 증가할 것은 자명하다. 채널 조작 능력이 없으면 좋은 정보도 소음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인류는 바른 정보를 얻기 위하여 채널 맞추기에 열중해야 한다. 정신개벽에 의해 주체적인 정보를 얻지 못한 인류의 미래는 물에 빠진 사람, 고장난 텔레비젼꼴을 면하기 어렵다. 구주 대종사님의 탄생백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불자들의 할 일이 많다.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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