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넓은 교화의지 희망
샌프란시스코 교당 장도영 교무
공항버스 운전하며 개척의지로 역경극복

사진>샌프란시스코 교당은 지난 8월 제3차 원불교 평화사절단이 교당을 방문했을 때 바쁜 가운데서도사절단 일행을 환영했다. 맨 좌측이 장도영 교무.
 교하의 사명을 교역자라면 누구 나가 지니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각종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국 땅 멀리 이주하여 지구의 한쪽 마당을 쓸겠다는 신념을 지닌 채 낯설고 물설은 가운데 교화하기란 간절한 서원 없이 절대로 불가능하리라 보여진다. 3년 가까운 세월을 미주서부교구 샌프란시스코교당에서 손마디가 굵어지고 그을린 얼굴로 바쁘게 살아가는 이방인 아닌 이방인 장도영 교무를 만나 교화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샌프란시스코 하면 미국 태평양연안의 대표도시 중의 하나이다. 유달리 동성연애자가 많고 자연스런 언덕과 꽃이 물결치듯 뻗쳐진 가운데 시끄러움과 조용함이 함께 하고 있는 이곳에 교당이 처음 자리를 잡은 것은 원기 68년에 거행된 첫 봉불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후 여러 가지 여건상 교당을 대 일리지역의 주택가로 옮겨 우선 교포중심의 교화의 나래를 펴고있다.
 전임 이제성 교무(현 서울 화곡 교당)의 헌신적인 교화의 뒤를 이어 원기 72년 2월 하와이 교당으로부터 부임한 장 교무는 토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낯선 사람 운전 기사가 도어 버린다.
 처음 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장 교무의 가슴에 공항운전출입증이 달려 있음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검게 타버린 얼굴빛과 굵어진 손마디를 보고는 장교무가 걸어온 발걸음을 꼬치꼬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장 교무가 해외교화에 남달리 사명감을 갖고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은 원기 67년부터 4년 간 서울사무소 사무장직을 수행할 때 교단에 대한 미래를 멀리 내다본데서 연유한다. 이미 그 이전에 광주서울 교당 등에서 교화경험을 가진 적이 있는 장 교무는 대종사님의 법음을 더 멀리 전하는 일에 의욕적인 발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사실 서울에서 지낼 때 기존의 교도 이에 외부의 비교도로부터 원불교에 대한 좋은 평가를 듣고 있었으나, 일면 폭 넓은 교화가 아쉽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리하여 교단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교화방향을 해외로 할 것을 확고히 굳힌 것이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자신은 곧 일원의 진리를 선양하는 교역자라는 생각아래 교단의 어려운 부분을 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자기 시험부터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지리산 종주의 성공여부가 해외교화의 가능성 여부가 된다고 진단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라 여기고 30Kg의 배낭을 메고 성공함으로써 해외교화의 뜻을 계속 폈던 것이다.
 원기 71년 출국하여 하와이 교당에 첫해외 교화의 발판을 굳힌 이듬해 샌프란시스코 교당에 부임하고 나서는 교당으로 창설되어 3번째 이안 봉불이 있기까지의 과정과 당시 상황을 파악한 장 교무는 전임 이교무가 어려운 고비를 넘겼음을 실감하고는 모든 면에서 가능한 한 자력으로 교화의 터전을 더욱 튼튼하게 가꾸기 위해 여러 가지 궂은 일을 하게되었다. 물론 이 같은 일에는 정토회원(김지인)의 고생 또한 컸다.
 그 후 장 교무는 우선 안정된 직장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가능한 곳을 타진하다가 모교인 부산경남 고 선배가 사장으로 근무하는 공항버스회사인 에어라인 코우치 서비스주식회사에 작년 12월 취직(?)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이곳에서 장 교무는 9백여불(한화 약 60만원)의 월급을 받고있었다.
 그러나 2백여 평의 대지에 70여 평의 연건평으로 되어 있는 저택 (후에 법당과 2개의 방과 차고 등으로 개축했음)을 은행융자를 받아 매입했고 그 외에도 냉장고 등 교당집기 등의 대부분을 같은 융자로서 확보한 만큼 부금 내는 일이 여간 부담되지 않음에, 월급 9백 불이라 해도 이리저리 쪼개 쓰는데는 어려움이 크기만 하다.
 한편 장 교무는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토요일과 일요일만큼은 쉬임 없이 교당의 교화를 활성화시키고자 간절하게 기도하고 영원하면서 그에 따른 노력을 한 결과 일요법회에 15명, 수요 야회에 5, 6명의 교도가 나오도록 했다. 이중에 수요 야회는 염불과 좌선 등으로 진행하는데, 참여하는 교도 모두가 열심이어서 더욱 활성화 시켜나갈 예정으로 잡고있다. 또한 일요법회시간에 아담하게 꾸며진 어린이 법당에서는 어린이 법회가 열리며, 여기에도 5, 6명의 어린이가 참석한다.
 그러나 아직도 본토인교화는 엄두도 못 낼 형편이다. 이에 대해 장 교무는 본토인 교화는 우선 상당한 차원의 영어구사가 가능한 교역자가 있어야 가능함은 물론, 되도록 이면 관습이나 가치관이 크게 다르지 않는 교역자가 충원되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타종교의 교세가 실로 크다는 데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얼마전 나무지붕으로 되어진 법당 채의 벽과 기둥을 들어내던 중 지붕이 무너져 내려앉음에 교도와 정토회원 등의 힘을 모아 직접 개축하다 시로부터 빨간딱지가 붙는 수모를 당하는 등 온갖 어려움을 맛본 장 교무는 교하에만 전력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만을 기대한다며,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할 것이라고 하신 최초법어의 말씀대로 좀더 큰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서 사명감을 발휘해 가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시급함을 지적한다.
 또한 장 교무는 한국의 많은 타 종교인들이 미주여기저기에서 유학하여보다 깊은 종교연구에 몰두하며 어학을 보충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빨리 교단의 기획 부서에서도 이 같은 일에 눈을 돌리길 바란다고 조용히 건의하기도 한다.
 조상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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