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법랍 56년 - 일원회상 성자의 생애

 교단 원로이며 수위단원인 고산 이운권 종사가 24일 0시 30분 중앙총부에서 숙환으로 열반했다. 세수는 77세, 법랍은 56년.
  이운권 종사의 법위는 정식 출가위, 사업성적은 정 특등으로 원성적 정특등에 해당되어 중앙총부 소관회의에서는 고산 종사의 장례절차를 교회 전체장으로 시행키로 결의하고 장의위원회(위원장 이철행 교정원장)를 구성, 26일 오전 10시 30분 중앙총부 기념관에서 발인식을 엄숙히 거행했다. 장지는 왕궁 영모묘원.
 대산종법사는 설법을 통해 영산회상에서 법연으로 약속하셨던 고산 원정사님, 새 주세불 대종사님께서 기다리고 찾으셨다가 네가 올 줄 알았다. 운권이다하시고 앞으로 일체중생의 삼독오욕인 먹구름을 다 거두어 제도하라하시며 맞이하신 원정사는 일생을 위법망구 위공망사의 화신으로 일관하다가 오늘 다시 그 약속 지키려 떠나셨다고 설법하며, 출가 56개 성상동안교정감찰 양원장을 비롯해 교하 훈련 사업 등 교직을 두루 거치며 두 스승님께서 세워주신 공부사업의 기초와 기관을 더 다지고 확립하며, 확장해 연원을 튼튼히 하고 신성을 다해 정통 정맥 정법 정신의 대의를 세워 천불만성이 무수히 배출할 수 있도록 큰 효성과 불사를 다하시었습니다. 영산 7년 근무시 30리 거리의 신흥리에 가정을 두고 할애출가로 금욕난행의 대불공을 하였으니 이는 구인선진들이 보인 백지혈인의 실천적 산 사표였습니다. 이 대 희생의 씨앗은 그 가문에서 수 없는 불 보살들이 이어 나와 이 교단의 구석구석에서 창립의 역할을 다하고있으니 참으로 거룩한 성자의 일생이었습니다. 서울회관의 대수난시 도인 형제로 순경과 역경을 맡아와서 이런 큰 회상에 역사의 한 과정을 넘기게 하고, 전화위복으로 이끈 평가는 원불교의 단결 상을 보여주었으며, 위난 시 생명과 재산을 던질 인물이 많이 배태되었고, 교단의 수난을 극복할 능력을 키웠고, 교화 장으로서 큰 모습을 나타나게 한 것이라고 추모하며, 다음의 법구로 영로를 박혔다.


  고산 이운권 종사는 1914년 5월 3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부친 이형기 선생과 모친 신이경 선생의4남2녀 중 3남으로 출생하여 원기 18년 12월 30일에 입교, 동년 4월 1일 출가해 전무출신의 길을 걸으면서 영산 서무부 서기(7년 간), 영산 선원 교무(3년 간), 교정원 공익부장(1년 간)을 비롯해 감찰원장교정원장총부 서울사무소소장일본교구 교령 등 교단 중요 요직을 두루 맡아오며 무아 봉공의 삶을 살아왔다.
 한편 교단 초기 정기간행물이던 회보를 계승, 원기 34년에 창간돼 발행해오다가 625동난으로 중단된 원광의 복간에 정성을 쏟고, 원기 50년 2월에 종교계를 창간하는 등 원불교문화창달에 남다른 관심과 열의를 다했던 고산 종사는 원기 61년 삼가 정수를 저술하여 후진들의 수행공부에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원기 39년 4월 26일 거신이란 법호를 받았고, 원기 38년 4월 26일 수위단원에 피선된 후 교단 발전에 심혈을 기울여오던 중 원기 73년 5월 교단 창립 제2대말 결산기를 맞아 개최된 제122회 수위단회에서 법위를 출가위로, 종사의 법훈을 서훈했다.
 중앙총부 원로원에서 정양하며 후진들의 신앙과 수행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고산 종사는 무무념의 생활로 도방하를 몸소 실천하며 생활하다 24일 열반에 들었다.

 고산 이운권 종사 약력
 1914년 5월 3일 전남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출생 원기 18년 12월 30일 입교 동년 4월 1일 출가, 영산서무부 서기 동25년 영산선원교무 동28년 교정원 공익부장 동29년 원평교당 교무 동31년 중앙총부 교감 동33년 감찰원부원장 동 34년 중앙총부 감사서기부장 동35년 중앙총부 서기부장 동36년 감찰원장 동38년 동산선원교감 동41년 동산선원장 겸 교감 동46년 중앙선원장 동50년 총부서울사무소장 동52년 중앙총부교령 동56년 교정원장 동59년 일본교구 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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