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김중묵 종사편 8
샘솟는 법열
구도현장에서 무시 선을 표준으로 정진

사진> 불법연구회 정문.
 나는 가끔 그 당시 정산종사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내 영생 길을 그르칠 뻔했다. 어쩌면 이러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영혼의 문제 삼세 인과 문제, 업의 문제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연구와 스스로의 신앙행위를 통해 체득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유일학림을 졸업했고, 원기 37년 개인 사정으로 1년 동안 휴무하고 영산 과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영산 과원은 현재 영산 선원 여자 숙소인 원광 원과 대각지 앞터에 있었다. 원광원 자리에 있었던 과원에는 주로 복숭아나무를 심어 가꾸었는데 이는 대종사님 제세 시부터 관리해 왔다. 그러나 대각지에 있는 과원에는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이 과원은 대종사님 열반 이후에 이룬 것으로 후일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밭으로 변경했다. 복숭아밭은 625이후 과수의 노쇠로 역시 과원의 문을 닫게 되었다.
 나는 전무출신의 입문 후 총부에서 이 과수원 일을 익혔기 때문에 특별한 어려움 없이 주어진 업무를 수행할 수가 있게 되었다.
 영광에는 이흥과원과 함께 영산 과원이 있어 교단 초기에 영육쌍전과 이사병행의 정신을 선양하는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생각하면 퍽 흐뭇하고 보람 있었던 일이었다. 오늘날 보다 얼마나 어둡고 뒤떨어진 사회였지만 한 성인의 출현은 그 시대와 사회를 변혁시키고 인간성을 회복하여 역사 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종교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시대에 대종사님 같은 도인이 나셔서 자력 양성의 길을 가르쳐 주셨고 인간생활의 윤리와 도덕을 밝혀 주시어 어디에 편착 되거나 의뢰하는 일 없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깨우쳐 주신 것이다. 생각할 수록 다행스럽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이 회상에서의 온갖 궂은 일을 해도 기쁘고 즐거웠던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몇 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변함이 없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공부 심으로 영생을 일관하려는 서원을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을 보면 대견하고 신통하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세대는 아무리 헐벗고 헐 먹으면서 구차하게 살았지만 대종사님을 직접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만가지 고초나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니었고 샘솟는 법열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젊은 청년들은 대종사님도 정산종사님도 뵙지 않았는데도 선원을 세우고 이 교단에서 일하고 공부하겠다고 열심히 사는 것을 보면 어찌 대견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영산 과원에서 근무하는 1년 동안 더 없는 보람으로 성지의 기운에 젖어 어쩐지 모르게 보내게되었다. 성현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구도의 발길을 따라서 나의 의지를 굳혔고 본래목적을 반조하곤 했다.
 그러므로 밤낮 없이 밀려오는 일들이 귀찮지 않았고 흙 냄새 또한 향기로운 대지의 숨결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무시선과 무시선법으로 표준하면서 업력을 녹이려고 했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유무념 공부하는 감상을 다음과 같이 읊어 보았다.

 오호라 넓고 넓은 우주 중에 한 개 티끌과 같은 이 내 몸이여, 참나를 찾아 평생토록 어둡고 어두운 속을 헤매었구나. 부귀 영화는 원래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오직 성불 제중의 길을 구하려는 것이 나의 참된 소원이로다. 인간 세상의 길고 짧은 일들을 조금 알만하니 벌써 이 모이 늙고 쇠약했음이여 앞길을 알고 보니 갈길 바빠 스스로 재촉하는구나, 선의 마음이 아니면 일어나지도 않고 선의 자세가 아니면 자지도 않을 것이며 한 수저 밥도 선하는 마음으로 먹고 한 걸음 발길도 선의 자세로 걸어가리니 동정간 항상 선을 닦아 참마음 찾기를 떠나지 안으리라. 오직 나에게 흰콩 검은콩의 스승님과 벗이 있어서 악을 경책 하고 선을 찬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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