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궁극적인 물음에
하나되는 법풍 진작
이 세상이 다 무너진다 해도
그 믿음과 삶 귀의처는 불변

산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로서 우리 인간의 삶이란 물음의 연속이라고 보아 좋을 것입니다. 그 물음은 죽음의 문제, 고뇌의 문제, 선악죄복의 문제, 의미있는 삶의 문제등이 있습니다. 종교신앙은 인간의 삶속에서 이러한 물음에 해답과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의 사회변화가 물질문명의 급진적인 상황속에서 정신문명이 거기에 따라가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정을 얻지 못하고 정신적인 불안과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왜 존재하는가 내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생의 근원적인 물음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모습 이것이 오늘 현대인들의 삶의 한 단면이라고 보겠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볼 때 대산 종법사님의 신년법문―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인생의 믿음처와 일터와 귀의처를 강조하신 것은 삶의 근원적인 물음과 신앙인의 근본을 확인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수년전 친구의 여동생이 결혼한지 3년만에 백혈병으로 병원에서 숨져가는 것을 지켜본 일이 있었습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하자고 굳게 맹세했던 남편과 자기생명의 분신인 아가의 눈망울을 뒤로하고 임종을 맞는 그녀의 마지막 눈빛에서 너무나도 가슴 아팠던 인생고뇌를 실감했습니다. 마지막 숨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그녀가 괴로워하는 죽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소중히 생각했던 남편과 아가 부모 형제 돈 지식,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인생의 전부를 바쳤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그녀를 더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한 여인의 최후의 눈빛속에서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 생존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골돌히 생각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키에르케골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이 다 붕괴되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 이 나를 버리고 떠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만은 꼭 붙잡고 영원히 놓지 않을 신앙의 귀의처를 갖고 살고 있는가?
출가와 재가 전 교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 물음 앞에 서야 할 것이며 믿음이 나의 삶속으로 파고 들어와 내 속에서 불타오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구태여 극한적인 죽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모험이고 불안과 두려움 고독이 수반된 나그네 길입니다. 이러한 실존적 불안과 고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신앙에서 찾아야 합니다. 진리를 믿고 스승을 믿고 법과 회상을 믿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그러기로 하면 다음 4가지가 먼저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조용히 명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시시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심고와 기도로써 진리와 나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질 때 진리가 내 속에서 살아 숨을 쉽니다. 인간은 누구나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마음이 불안하고 그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 그때 그때 상황을 대치해 나가는 데에는 기도보다 더 위대한 힘은 없다고 봅니다. 유무념 공부를 수행상에서 마음 챙기고 안 챙기는 것으로 대중삼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을 모시고 사는가 안 모시고 사는가로 대중삼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하루에 열 번 이상만 마음 챙겨 법신불을 모시고 그 때마다 간단한 심고나 기도를 올리게 되면 자연히 진리와 함께 동반하는 삶이 되어집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자연의 이법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보고 듣고 숨쉬고 살아 움직이는 우주적 대 생명체로 인식되어져야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진리의 밝음보다 사람의 눈을 더 두려워 하고 진리의 앎보다 사람의 귀를 더 무서워 하며 진리의 소리보다 사람의 입을 더 조심하는 것은 진리를 단순한 이법으로만 생각하고 살아있는 우주적 생명체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회상과 내가 하나되는 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영산성지를 가끔 순례하여 대종사님의 탄생 및 구도지를 직접 답사하고 새 회상 초창 당시 구인선진님들의 얼과 숨결을 하나 하나 전하여 이 회상 창립의 정신을 몸소 체험하는 성지순례 작업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중앙총부를 비롯하여 제법성지인 봉래정사까지 답사하기를 권고하며 당국에서는 교사를 중심으로 안내서를 만들어 성지 순례자들에게 배포하는 작업도 회상의 신과 스승의 신을 심어 주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셋째, 법을 믿는 신심을 키우기 위해 교화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교서보내기 운동에 전 교도가 참여하여 일원의 법음을 전하는데 합력하고 교도는 설사 하루 한 끼 식사를 거르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에 1장 이상 교서를 읽는 운동이 교도 가정마다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역자는 교당 살림이나 일반집무에 비해 실력향상과 법회 운영에 최선의 노력과 성의를 다바쳐 법풍이 충만하도록 힘써야 하며 교도는 법회보는 것을 생명으로 알아 사소한 일로 결석하는 일이 없도록 신앙적인 차원에서 진리와 스승전에 서약해야 할 것입니다.
시냇가에 흐르는 물도 조그만한 솔가지 하나가 결국 시냇물을 막아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잎 하나가 어떤 장애물에 걸리면 그 뒤를 이어 다른 물질들이 모여 흐름을 막아버리는 것처럼 법회 한번 기도한번 빠지는 것 그것이 결국은 신의 전정을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연조가 깊고 높은 위에 있을지라도 법회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신앙이 죽은 사람이고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에 멀어지게 됩니다.
넷째, 교도는 교당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크나큰 기쁨과 영광과 보람으로 알고 시간을 내어 연원다는 일에 앞장서고 순교 다니는 일에 적극 참여하여 불신자에게 법연을 맺어주고 법회에 참석하도록 전법활동에 앞장서서 믿음의 불꽃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이 썩어버리듯이 우리의 믿음도 활동으로 유통되지 않으면 썩고 맙니다.
나의 노력과 정성과 물질이 투자된 만큼 교당과 스승님과 법을 섬기는 신심도 비례됩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무엇을 생각할고, 도를 생각하리라. 내가 무엇을 말할고, 도를 말하리라. 내가 무엇을 행할고, 도를 행하리라」하셨습니다. 새 회상 창립 69년을 맞이하여 백만교도인 우리는 우리 선진들의 혈성어린 창립역사를 되돌아 보며 「내 무엇을 생각할까 신심을 생각하리라. 내 무슨 말을 할까 신심을 말하리라. 내 무슨 행을 할까 신심을 행하리라」고 다짐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신심으로 일관하는 한 해가 되어 영겁을 통하여 기쁘게 바치고 구제받는 갑자년이 되어야 스승님께 보은하는 뜻깊은 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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