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과 은혜의 한빛
- 이 성 신 ④
광島에서 문맹퇴치운동 전개
중학교에 1명 진학시키기도
특지가들의 도움으로 영산성지에 전기가설
광주교당 12년
광도어린이 초청

불어나는 교도들의 관리를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했다. 교화는 모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조직을 통해 흘러나가는 교도들을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법회에 모이는 교도들도 묵었다. ①반야회는 50세 이상 교도들로 매월 1회 모임을 갖고 ②금강회는 4~50대의 모임으로 월1회 집회 ③원우회는 학생회를 졸업한 청년회 출신으로 결혼 후 부부가 함께 모이는 것으로 매월 첫 일요일 ④성년회 3~40대 초반 부부 모임으로 매월 10일이 정기모임 날 ⑤한줄기會는 어린이 학생회를 졸업한 청년들 모임으로 매년 1회식 모이고 ⑥봉사회는 성년회원들이 주가 되고 각 서클 대표들이 참가 매월 2회 모이며 ⑦요인회 ⑧기도회 이 밖에도 청년, 학생 등 기존법회는 그대로 존속하면서 특별조직을 한 것은 교화의 다양화를 위해서였다. 요즈음 상당히 일반화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별 조직이 없던 때였다.
드디어 원기 52년 2월 광주교당 대법당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 공사를 위해 계를 조직한 일은 없었다. 연이어지는 의식수입으로 충당했는데 총공사비는 3백47만원이었다. 물론 단층공사였지만 5층 올릴 기초공사를 했었다. 7월 완공과 함께 봉불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나는 이제 대외적인 사업을 할 때라 생각하여 원기 53년 8월 11일 여천군 삼산면 손죽초교 광도분교 어린이 23명을 초청하였다. 시내 각 기관의 후원을 얻어 광주지방 명승지와 각 기관을 관람시키고 결연식을 가졌다. 학생회원들은 폐품수집과 신문팔이, 아이스크림 장사로 자금을 모았다.
초청된 어린이들은 기차와 자동차는 물론 고양이도 몰랐다. 4일 동안 머물며 견학을 시켰고, 의류 ㆍ 학용품 ㆍ 의약품 ㆍ 학교비품 등을 선물했다. 반듯한 운동장 하나 없고, 정기여객선도 없어 육지와는 단절된 섬 어린이, 각 매스컴은 보도에 열을 올렸다. 총 경비 20만원으로 시작했는데 뜻있는 일에 온정을 쏟는 교도들과 사회단체의 후원으로 1백만 원이 넘게 답지되었다.
그 후 매달 학용품을 보냈으며 9월부터는 방영자(법명 ㆍ 선덕) 어린이를 교당에 데려가다 조선대학 부속여중에 진학시켰다. 그리고 청년회원들은 이 광도에 가서 문맹퇴치운동으로 야학을 실시했고 주민 1백70명을 입교시켰던 것이다.
아마 섬 어린이를 교당에 초청하고 자매결연을 이룬 것은 교단사상 처음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숨 가쁜 교화일정
이듬해 7월 20일 오후 4시에는 BBS(소년직업보도원) 회원 1백22명을 초청하여 학생회원들과 자매결연式을 가졌다. 시내 기관장을 비롯한 내빈 다수와 1백여 교도가 참석하여 눈시울을 적셨다. 상호 회원들은 환영사와 답사로 우애를 다졌다.  오후 5시 결연式을 마치고 다과회를 겸한 오락회를 열었고, 저녁식사 후 교화부가 제공한 교단소개 슬라이드를 감상하고 8시 30분경에 헤어졌다.
이 일을 하기 위해 학생회원들은 노력봉사 활동을 폈다. 남학생 20여명은 10여 일 동안 교도 댁에 연탄배달을 하였고, 여학생들은 아이스크림과 빵장사를 했으며 보은함 수입과 교당 구내서점의 수입으로 런닝, 타올, 연필, 하모니카, 만년필, 혁대 등을 선물했던 것이다.
BBS란 일종의 소년선도운동으로 20세기 초 미국에서 발달한 청년들에 의한 문제아의 교화지도운동의 하나이다.
이에 앞서 원기 52년 6월 영산성지에 전기를 가설하였다. 그동안 촛불로 공부하던 학생들에게 밝은 전등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은 조추연 ㆍ 변중선 ㆍ 김광준씨 등 특지가들의 합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요경비는 2백50만원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KBS 방송국에 매월 마지막 일요일 방송설교를 실시해 원불교의 사상을 다소 전달할 수 있었다. 7월에는 광주일고에 교우회를 조직하여 학생교화의 새로운 장을 연 셈이었다.
원기 54년 6월에는 구례교당을 창설하였고, 제주도 서귀포에도 교당을 마련했다. 서귀포는 육지와는 달리 바다 건너 멀리 있어 교당창설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호법동지들의 염원으로 이룰 수 있었다.
원기 54년 나는 제주교당 출장법회를 보면서 서귀포에 교당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마침 서귀포 김도진 ㆍ 고정귀화 내외분이 대지 1백30평을 대여해 주겠다고 하여 신축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7월 1일부터 공사를 시작, 이법륜 부교무가 임시 주재하면서 공사감독과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처음 대지를 대여하겠다던 도진씨는 대종사님 법에 감화되어 희사하게 되었다. (시가 3백25만원) 그래서 서귀포邑 서귀2리에 건평 21평의 법당을 신축하였다. 이에 앞서 원기 51년 5월에는 곡성, 8월에는 문장교당을 설립하는 등, 내가 부임 초에 교도들과 군소재지 교당창설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져 갔던 것이다. 참으로 숨 가쁜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법사 ㆍ 군산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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