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찾은 압해교당
17년 전 목포교당서 법회시작
“교화단 체제정비, 훈령을 강화할 터”
어려운 여건 딛고선 새 교화場
압해도의 이모저모

유달산을 끼고 돌아 「제께」라는 곳에 도착,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이는 압해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바다냄새가 코를 에워싸고 유달리 심한 목포사투리가 자꾸만 귀를 때렸다. 신안 앞바다의 유물을 건지려는 뜻도 아니건만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옮겨지는 것은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 가을의 어느 날 10분도 채 안 걸리는 시간동안 배를 타고 압해도에 내리니 섬답다기보다는 흔히 볼 수 있는 농촌 같았다.
송공산(해발 2백30m)을 최고봉으로 하고 44.3㎢의 면적에 1만1천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압해도는 머지않아 목포시로 편입될 예정일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지역의 후보지이기도 하다.
섬 전체가 「人」字를 이루고 있어 해안으로부터의 거리가 가깝고 낮은 구릉이 연이어져 있으나 간척사업으로 해안선이 직선화되어가는 가운데 쌀, 보리, 콩, 고구마, 고추 등의 농업과 굴, 조개, 백합 등의 양식업이 활발하다.
의료시설로는 보건지소, 약국 등이 1개소씩 있고 옥산성을 비롯한 선돌과 고인돌 등의 약간의 문화재가 있고 초등학교와 중 ㆍ 고교가 1개씩 있는 이곳에 압해교당(교무 ㆍ 조혜명)은 면소재지가 있는 鶴橋里에 위치해 있다.
압해교당의 연혁
파란 금잔디가 안마당을 수놓고 있는 압해교당은 17년 전 서울교당 장심인행 주무가 시가와 친정이 있는 압해도 주민들에게 일원의 복음을 전하고자 당시 목포교당 이정무 교무(현 수원교구장)를 찾아가 의논, 교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원기 54년 3월부터 이정무 교무는 이곳 강원봉씨 댁에서 26명의 인연동지가 참석한 가운데 첫 법회를 본 후 월 1 ㆍ 2회 출장법회를 보았다. 이때 장심인행 주무가 교당마련에 뜻을 세우고 부군인 강윤원씨와 합의하여 同55년 10월에 현 부지 5백 평을 사용권만 매도, 희사 받고 건축기금 1백50만원으로 건평 40평을 교도의 공동출역으로 짓게 되었다.
원기 56년 3월 초대 정영은 교무의 부임과 더불어 同년 11월에 봉불 및 낙성식을 거행하고 鄭교무의 사정으로 후임이 비게 되자 오희원 교무(서울서부교구 개봉교당)가 출장법회를 보았다.
同57년에는 대광옥 ㆍ 김경인 교무가, 부임하여 제1회 교리강습을 개최하여 이른바 「섬 속에서의 교화의 붐」을 일으켰다.
同62년에는 제3대 손덕선 교무가, 동 65년에는 제4대 양재원 교무가 부임하여 어린이교화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 교실은커녕 놀이터도 없는 상황에서도 「원광어린이집」을 개설했다. 또한 同68년에는 장심인행 주무의 2백50만원과 이공주 법사의 1백만 원 그리고 중앙총부 보조금 등을 모아 부지 4백89평을 광주국세청으로부터 매도, 완전히 이전등기 함으로써 그때까지의 숙원사업이던 부지확보 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일을 해결하는 데는 박형근 교도회장이 발 벗고 나서 동분서주한 결과이지만, 이 일로 해서 법당과 유치원舍를 개조함으로써 교화의 새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교화현장 및 전망
17년의 장고한 세월이 흐름 속에 오직 「인내」와 함께 지내온 역대교무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압해교당.
예로부터 佛心보다는 천재지변에 안심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 巫俗이 무성하다할 수 있는 이곳에는 오늘날 불교, 천도교, 원불교가 1개소인데 비해 16개의 기독교와 2개의 천주교가 포교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인연은 평범함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기에 교화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이라 믿으며 금년 초에 부임한 제6대 조혜명 교무가 밝힌 교도 수는 평균 일반교도가 20~30명, 어린이와 학생이 10여 명씩이다. 6년 전 문을 연 원광유치원에 28명의 어린이를 유선자 교사와 함께 가르치면서 趙교무는 지도, 그들 모두가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사람」과 같은 새싹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경제적 도움보다는 오히려 다소 마이너스 상태이지만 2세를 기르고 자모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에 유치원운영을 계속하고 있다.』는 趙교무는 『부임할 때 다소 암담했던 상황을 이겨냄에 따라 교화의 가능성을 찾았으니, 앞으로는 교화단 체제를 정비하여 뿌리 깊은 교도훈련에 힘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육지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교당살림에서 유치원 운영과 교화에까지 할 일 많고 어렵기만 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교화의 열매가 인과의 이치대로 더더욱 풍성해지길 합장하면서 교당 밖을 나서니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조상원 기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