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앞으로 3년
성주성지 성역화 기초사업 추진돼야
훈련ㆍ기도실 겸한 기념관 건립 구상

 정산종사 탄생 1백주년이 3년(원기 85년, 서기 2천년)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정산종사 열반 35년, 정산종사 일가가 성주에서 영광으로 이사 한지도 어언 80여년.
 지난달 11일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회 재정ㆍ건설분과 위원들이 성주성지 성역화 기초사업의 구상을 위해 대절버스로 성주로 향하는 표정들은 진지하기만 했다. 차내에서 일원대도 교화활성화와 정산종사께 보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두 손을 모우고 심고 올리는 모습에서 그 심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재정ㆍ건설분과 부위원장인 교정원 재무부장 김장원 교무는 정산종사 탄생 1백주년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보은할 수 있는 기회인 만큼 여기 모인 위원들은 성심성의를 다해 역할들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고 당부했다.
 버스가 김천 국도를 거쳐 초전면에 들어서자 원불교 성주성지 도로표지판과 원불교 사적지 정산종사 소성동 유허라는 표지석이 반갑기만 하다. 들어가는 길목에는 수확을 앞둔 벼와 비닐하우스들이 눈에 들어온다. 끝물 참회를 내고 있는 동네 주민들의 손길들이 바쁘기만 하다.
 위원들은 탄생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로 좌측에 순례객들을 위해 마련된 6백 50평의 주차장 부지에 하차해 소야를 비롯 정산종사 일가가 영산으로 이사하기까지 살았던 박실마을 쪽과 달산(월산)쪽을 둘러본다.
 탄생지를 향해 걸으면서 연신 사방을 둘러보는 눈들이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전무출신 구산 송벽조 대희사(1876~1951)가 준타원 이운회 대희사(1872~1967)와 고산동에서 결혼 얼마후 10여리 떨어진 소성동 구성마을로 이사하여 정산ㆍ주산 종사, 두 성자를 낳은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정산종사 탄생지(201평)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매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3년 4월 인천교당 이성규ㆍ유순명 부부교도의 희사금으로 매입, 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김인철, 당시 교정원장)에 의해 1994년에 복원됐다. 본채(13.5평)에는 정산종사와 주산종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어 더욱 정감이 가게한다. 향냄새가 바깥으로 까지 배어나는 느낌이다.
 곧 이어 성주성지 최경인 교무와 성주교당 유법원 교무가 정성을 기울여 무공해 먹거리로 장만한 점심식사 공양을 했다. 식사를 마친 재정ㆍ건설분과위원들은 행랑채(6.5평)에서 성지사업에 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달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정산종사가 9세까지 살았던 이곳에서 나누는 회화 내용은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ㆍ전주ㆍ광주 지역에서 정산종사 일가인 이리보화당 송성찬 사장을 비롯, 탄생지 복원에 심혈을 기울인 안도순 교무와 원광대 토목공학과 곽계환교수, 서울지역 최준명 서울교구 교의회 의장, 대구지역에 재정ㆍ건설분과 위원장인 유홍선 대구교구 교의회 의장과 삼덕교당 이성제 교도회장등이 중요 멤버로 참석했다.
 이날 최준명 위원은 성적지 건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계획서가 나와야 하고 거기에 맞춰 예산을 세워야 한다며 땅은 1차적으로 어디를 매입하고 건물은 어느것 부터 시작한다는 안이 나와야 기관이나 교당, 출가 재가 교도들도 기본 계획서를 보고 합력할 수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대구경북교구장 이정무 교무는 기도실 건축과 훈련실, 관리사무소등 성지사업의 기본 방향이 나와 연차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회의를 마친 위원들은 성주성지 출신 송인걸 교무(본사 편집국장)의 안내를 받으며 우선 훈련실, 기념관, 기도실 등의 기능을 아우른 복합 건물을 지을 터를 살펴보기 위해 탄생지 뒷편으로 나있는 해발 611의 달산 쪽으로 향한다. 달산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한 농가에는 마늘이 헛간채에 메달려 있고 고추와 호박을 말리는 모습들도 눈에 띈다. 가을이 달산자락에도 성큼 다가왔는가 보다. 위원들은 가을이 지천으로 깔려있는 성주성지의 전경을 보면서 성지일대에서 적합한 터를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고산정 등 인근에서라도 물색한다는 방침을 논의했다.
 위원들은 적합한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정산종사의 성장 구도지인 박실마을터로 향하던 중 정산종사가 결혼하였던 마을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곳 소야집터는 정산종사가 9~13세까지 생활했던 곳이다.
 위원들은 소야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지않은 박실마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정산종사가 14세부터 생활하면서 스승 찾아 전라도 행을 하기까지 구도역정을 벌였던 박실마을. 원기 69(원기 1984)년 매입한 박실구도지의 나즈막한 언덕을 오르면서 기도를 하던 정산종사의 모습을 조용히 그려본다. 그리고 백여리가 넘는 가야산을 여러차례 내왕하면서 도를 이루고자했던 절절한 그때의 심경을 그려본다. 정산종사 시자였던 범산 이공전 종사(당시 중앙문화원장)이 주축이 되어 유일학림 1기생을 중심으로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소성구도지()비가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위원들은 정산종사 기도터인 거북바위 앞에서 정성스럽게 심고를 올렸다.
 사랑채 자리에서 멀지않은 곳 거북바위 앞에 성물을 진설해 놓고 기도를 올렸다는 정성스러움이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감돈다.
 위원들은 서둘러 정산종사 선대 고향이며 4백50년 역사를 지닌 인 고산정 백세각으로 향했다. 이곳은 정산종사 14대조인 충숙공 야계 송희규(1494~1558년)선생이 터를 잡은이래 야성송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어있는 이곳은 정산종사의 학문 탐구지이기도 하다. 정산종사가 10여세 초반 일년에 한철씩 백세각에서 영남의  공산 송준필(1869~1943)선생으로 부터 유학을 배운 곳이기 때문이다.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백세각 곳곳을 살펴보던 위원들은 전국에서 사저로는 몇채 되지 않은 4백년이 훨씬 넘은 조선조 전통 목조건물이 몇해전 뜻 아닌 화재로 건물 외부가 손상을 입은 것을 안타까워 하며 야성송씨 교화를 위해서라도 교단적인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뜻을 나눴다.
 대구ㆍ서울ㆍ익산지역에 산재한 위원들은 성주성지 일대인 구성 탄생지, 소야 성장지, 박곡 구도지, 선대 고향이자 학문 탐구지인 고산정 순례를 끝으로 11월 10일 정산종사탄생 백주년 위원총회에서 반가이 만날 것을 기약하며 발길을 옮겼다.
육관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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