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무아의 마음은 진리와 합일한 대아
죄복의 권능자, 모두는 일체 생명의 근원
참 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공동 목표

대도순환의 운행에 따라 그토록 춥고 지루했던 산하대지에는 찬연한 서기가 돋고 혹독한 풍설에 시달리는 일체만물이 소생의 활기를 띄워가는 사월은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이루신 달이다. 따라서 우리교단이 탄생한 개교의 의의깊은 달이며 진리의 혜명이 온누리에 편안하여 어둡고 각박하고 메마른 중생의 마음을 훈훈한 대도훈풍으로 제도에 착수하신 달임을 새롭게 느끼며 앞으로 제2대말 결산과 대종사님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을 앞두고 우리는 창도하신 일원대도를 좌표로 성불에의 정진과 제도에의 사명완수에 불멸의 혼을 쌓아가야 함을 다시금 다짐한다.
대산 종법사님 신년법설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이 세가지 물음을 통하여 전 교도와 전 국민과 전 인류에게 큰 진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즉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진리, 스승, 법, 회상, 사은, 자기, 이 여섯가지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기라고 말씀하시고 이 자기는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과 사은과 합일한 자기이며 독로, 독생, 독존한 자기라고 말씀하셨다.
이 자기는 분별성과 주착심의 거짓 나(假我)가 아니고 두렷하고 고요한 자성을 회복한 진아이며 우주의 주인인 대아임으로 이 진아와 대아플 체득하고 보면 곧 부처님이요 성자이시며 이곳으로 돌아가는 길이 우리들의 공동목표이며 공동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진아로 돌아가려면 첫째 저녁의 반성시간과 아침의 좌선시간을 생명같이 소중히 알아 일심으로 정진을 하자. 그리하여 밖으로 국을 키워 심량을 고아대하게 하며 안으로 불같이 일어나는 嗔心을 참아서 망념을 제거하고 진여의 본성을 지켜 청정함은 허공같이 하고 마음에 자유를 얻어서 어떠한 역경과 난경과 고경에도 순경의 유혹에도 끌리지 아니하고 요지부동의 정력과 영단을 쌓아가는 공부를 해야한다.
둘째 대각에 이르기까지 깨쳐가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석존께서 생사해를 건너지 못하면 죽어도 보리수하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본받아야 한다. 위법망구의 간절한 구도의 일념으로 법문 법설 사색등 뚫어보자 알아보자 깨쳐보자는 일념으로 오매불망 묻고 배우고 연마하고 탐구해서 대지혜를 얻고 오욕에 물들고 집착하는 욕심의 흑운을 거쳐 버려야만 자성의 혜광이 낭연독존하여 진리의 초점을 바로잡고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게 된다.
셋째 실천에 적공을 들이는 공부다. 계문 법규 규칙을 생명같이 지켜서 그 일 그 일에 不我를 놓고 正我를 세우는데 죽기로써 용감한 마음으로 실행하고 중도를 잡아 바른 처사를 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늘 나를 살피고 내 마음 밭을 매어 좋지 못한 습관과 나쁜 성격을 뜯어고치고 기질을 변화시켜서 나날이 새 사람이 되어 범부가 변해 부처가 되도록 실천에 능력을 쌓아가야 하겠다.
「정산종사 법어」원리편 33장「그대들은 허공이 되라. 허공이 비었으므로 일체만물을 소유하나니 우리도 대인이 되려면 그 마음이 허공같이 되어야 하나니라. 자신을 다스리되 빈 마음으로서 하고 가정을 다스리되 빈마음으로서 하고 나라를 다스리되 빈 마음으로서 하며 모든 동지와 모든 동포를 대할때에도 또한 빈 마음으로서 화하여 매사에 상이없고 원근이 없으며 증애가 끊어지면 불보살이니라」하시었다.
眞我는 허공마음이요 허공마음은 곧 무아의 마음이니 사대와 오온이 공하고 내 몸과 마음이 필경 공한 진리를 요달하면 아집으로 인한 모든 번뇌망상과 우수사려가 춘설같이 녹아서 법에 대한 희열심이 샘물같이 솟아나고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심낙을 누리게 된다. 진아는 곧 무념이니 사량과 계교심이 없고 순일하여 섞임이 없으며 천진무작하고 청정무애하다. 진아는 곧 무주이니 애착과 탐착과 원착에 끌리고 쏠리고 묶여서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착심이 없는 담담한 마음이다. 진아는 곧 무상이니 내가 제일이다는 아만심과 교만심으로 나보다 이상자를 보면 모략중상으로 깎아 내리고  나보다 이하자를 보면 무시하고 멸시하는 마음을 없애고 재산과 지위와 권세도 필경 공으로 돌아가는 무상의 이치를 깨쳐 자성에는 자타가 없고 귀천이 없고 미오가 없는 지선의 마음으로서 무상은 도덕의 으뜸이요 도덕의 왕입니다.
진아는 무위이니 흔적이 없는 행적으로써 있어도 없는 것같이 겸허하고 알아도 모르는 것 같이 겸손하고 모든일에 능하여도 능치 못한 것 같이 겸양하여 자취없는 덕을 쓰는이는 천지같은 덕을 쓰는이라 능히 시방을 거느리고 천복을 짓고 받는 사람이 된다.
진아로서 무아의 마음이 진리와 합일하고 스승과 합일하고 사은과 합일하고 보면 그 합일의 자리가 대아입니다. 물에서 살고 있는 고기는 물 없이는 살지 못하므로 고기의 생명은 물인것 같이 우리 인체로 호흡을 통하고 있는 육신을 일개의 생명체로 생각하나 크게 볼 때에는 법신불이며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사은이며 무한의 생명력이며 현묘하고 신기로운 위력이며 죄복을 내려주는 권능처가 모두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지수화풍의 대원료인 대자본 우주의 대신비 무한동력등은 대생명체이며 법신불 대아이며 낱으로 있어 대기를 호흡하고 있는 소생명은 색신소아인 것이다. 소아인 나와 진리와의 사이를 사은으로서 촌수를 알려주시고 윤기를 걸어주시고 인연을 대주셨기에 소아인 나의 일신은 사은의 공물임으로 다생겁래에 입은 사중은을 간절하게 뼈저리게 사무치게 느끼고 우러나는 마음에서 보은하게 될 때 우주 가운데에서의 나, 세계 속에서의 나, 인류 속에서의 나, 민족 속에서의 나는 둘이 아닌 하나인 자아를 발견하게 되므로써 우주일가 사생일신 자타합일의 대아를 체득하게 된다.
이에따라 인류애와 동물애와 만물애로 마음이 번져 인류와의 사이에 동물과의 사이에 만물과의 사이에 다정한 심념 가까운 심념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소중히 알고 귀여워하고 북돋아주어 아무리 나쁘고 못써도 버리지 않는 대자대비의 뜨거운 마음이 솟아나서 무한절대의 대은에 보답하려는 희생봉사의 의무감과 일체중생을 기필코 제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절실하여 진다.
부처님께서 악도중생의 고 받는 참상을 보시고 7일을 통곡하시며 안타까워 하신 마음 ― 밀림의 성자인 슈바이처 박사께서는 곤충의 죽음이 안타까워 램프의 불을 켜지 않으시고 불행한 흑인의 벗이 되어 구원의 열성을 다하신 행적 지장보살께서는 지옥중생의 고 받는 문전에서 떠나지 않는 도중의 행이 다 우주의 주인이신 대아의 자비행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대아를 체득한 마음에는 언제나 대감사심이 우러나서 고맙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하게되고 또 언제나 대 참회심이 나타나서 시시로 뉘우치고 시시로 참회하여 속죄의 봉사활동을 하게되고 또 언제나 대공익심이 나타나서 대중에게 정신 육신 물질로 온통 바치는 희생봉사의 활동이 발전되므로써 사생의 자부가 되고 진아를 회복하여는 최존 최귀 최대 최상의 가치를 발휘하므로써 삼계의 대도사가 되어 시방에서 옹호하고 높이 봉대하는 구원의 성자가 되기까지 영생을 한결같이 힘쓰는 일이 우리 공동의 절실한 목표와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우리는 전 세계를 불은화 하고 일체중생을 신법화 하여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시키고 일원의 세계 보은의 세계 평등의 세계의 지상낙원을 건설하여 가는 길만이 대종사님께서 일생과 영생을 통하여 홍은에 보은하는 길이며 혈심제자 되는 길이라고 굳게 다짐하는 바이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유 기 현<원광대 기획실장>
교파 종지 초월한 각의 세계를 믿고
대종사는 일원상으로 존재의 실상 상징
상생 상화의 기운 일으키는 수행 있어야
교파를 초월한 각의 종교
원불교 신앙은 개오종교, 각의 종교라는 점에서 먼저 신앙자의 마음이 그 무엇에 걸리지도 막히지도 않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그 사람이 바라다 본 세계는 우주 大의 큰 것으로부터 극미의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모순됨이 없이 상호 관련되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러한 각자의 인간 앞에는 따로 믿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있을리 없다. 모두가 부처로 화현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안목으로는 모든 존재는 경건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있어야 할 그들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를 지니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소태산 대종사는 스스로 대각을 하고 그 각행분상에서 사바세계의 중생을 내려다 본 것이다. 이와 같은 각행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소태산 대종사는 강연히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각의 종교는 궁극적으로 신심과 신해가 있을 뿐 신앙의 대상이 따로 있을리 없다. 상호 믿음직한 관계, 성실할 수 밖에 없는 순수지속, 그리하여 우상화에 떨어지지 않도록 일깨워 주는 행위만이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불교에서는 사실불공, 당처불공,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는 가르침을 편 것이다. 自覺覺他 覺行窮滿行이 있을 뿐이다. 원불교는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을 통로로해서 미오중생들을 모두 다 각행분상으로 올려놓기 위한 제도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그 무엇보다도 먼저 각의 세계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하여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은 일원상의 진리를 믿어야 한다. 원불교가 지향하는 교화의 터전은 한 교파의 독특한 가르침에 근거했다거나 또는 원불교라는 한 테두리안에서 특유한 인연중생들만을 위해 베풀어진 것이 아닌 가르침이기 때문에 모든 교파나 그들의 종지를 초월해 있는 일원상의 진리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일원상의 진리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들어 보기로 한다.
일원상 진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왜 일원상 진리를 믿어야 하는가? 일원상 진리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모든 존재는 그 진상이 가려져서 매우 왜곡되어 있다. 존재의 참 모습이 드러나려면 오직 인간의 각행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본 것은 인류사상 최초로 불타에 의해 증명된 것이며 최근에 이르러서 비로소 실존주의자 「야스퍼스」나 「하이덱거」들에 의해 「존재」세계는 인간(실존)을 통로로 하여 해명된다고 보기에 이르렀다. 존재의 세계는 각행분상에서 조명된 이법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미오한 세계의 현 존재를 근거짓고 있는 세계이다. 이런 관점을 대승불교에서는(삼론종) 世諦와 眞諦, 또는 俗諦와 제일의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른바 근원적 존재의 모습(풍광)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인과법칙의 불변성이 아닐까? 모든 것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마지 않지만 그 변하는 모습은 인과법칙을 따라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들이 변하지만 그것은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隅因的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결과의 법칙이 들어서 「크게 적게」(大小) 그리고 「있다 없다」(有無)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원인→결과는 불변의 법칙이지만 그 법칙의 종재방식은 단순하게 인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중중무진해서 무시간단으로 복잡 미묘한 상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각에 의해 이 진경을 조명한 불타는 「인연연기」라고 보고 「인연소생지법」이라 했으며 용수는 중론에서 공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의 미묘한 법상을 「衆緣生」이라 보고 因緣, 次第緣, 所緣緣, 增上緣, 等無間緣으로 전개된다고 밝혔다. 마명은 기신론에서 이 복잡미묘한 인연연기의 실상을 진여라고 부르며 진여의 전개되는 방식을 삼세육진이라고 밝힌바 있다. 용수는 이 미묘한 존재의 진경을 차라리 공(sunya)이라고 상징했는가 하면 마명은 이 존재의 참 모습을 진여로 상징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원상으로 존재의 진상을 상징한 것이 아닐까. 이 일원상 진리를 철학자들은 절대자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종교자들은 신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佛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각행분상에서 본다면 一者이다. 초월적으로 표현한 것이 신이며 이 일자를 내재적으로 표현한 것이 佛이라고 보아서 좋을 것이요 소태산 대종사가 표현한 일원상은 이 신, 불의 표현을 동격으로 동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일원상 진리는 위력이 있다
우리는 일원상 진리를 왜 믿어야 하는가? 일원상 진리는 위력이 있기 때문이요 우주 삼라만상은 생성하는 기운을 지녔으며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게하는 역동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연소생의 법리에 의하여 그 대생성력 대역동성은 시작과 끝이 없이 돌고 도는 가운데 생명력이 무위이화로 발생되었다. 이 대생명의 기운을 소태산 대종사는 사은의 위력이라고 보았다.
일원상 진리를 존재론적으로 밝힌것이 인과이법이라면 이 이법을 생성의 측면에서 밝힌것이 곧 사은이다. 전자는 理的으로 밝힌 것이라면 후자 즉 일원상 진리를 기적 측면에서 밝힌 것이 곧 사은이다. 이 사은은 생성의 기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원상 진리 그 자체의 규명을 理라고 본다면 일원상 진리의 생성을 밝힌 사은은 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과이법에 의해서 만물을 생성해 내는 그 위력(대생명력), 그 위력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만물(현존재), 그 만물중에서도 인과이법을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존재(실존)는 모든 존재 속에서 인간 존재로서의 기운을 얻었다는 점에서 은혜를 알고(지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우주의 전 존재를 사은으로 분류했으며 사은의 전 기운을 조화롭게 고루 잘 받은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이 아닐 수 없다. 사은의 위력을 믿고 사은의 기피력을 알아서 보은 감사하는 생활, 이것이 「만물지영장」으로서의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본다.
인간은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 깨닫게 하는 가르침을 만난 인간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복된 인간이며 위로는 순리자연한 인과의 이법에 순응하면서 아래로는 「나」를 중심한 이 현상세계 안에서 끝없는 감사의 마음을 솟구어 내며 모든 존재가 나와 관련되어 있음을 감지하는 생활이 될 때 그 터전은 곧 극락이다.
일원상 진리는 어떻게 믿어야 하나
일원상 진리의 각을 위해 우리는 먼저 각의 세계가 있음을 위에서 말했거니와 그 각의 세계를 원불교에서는 진리적 신앙과 사은신앙이라는 두 분야의 신앙체계를 보여줌으로써 각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도록 가르쳐준 것이다.
진리적 신앙이란 일원상 진리로 상징된 존재법칙으로서의 理가 주재하는 것이니 이 理는 곧 생멸, 죄복을 주재하는 권능이 있다고 믿자는 것이며 사은신앙이란 그 존재법칙으로서의 인과이법에 순응하면서 또 한편으로 잘못된 인과는 풀어가면서 자기 현실을 창조하려는 마음의 조정을 가르친 것이다. 따라서 진리신앙을 理의 신앙이라고 한다면 사은신앙은 氣의 신앙이라고 본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라고 하는 구체적인 한 인간이 이상에 밝힌 두 단계의 신앙체험을 해 나가는 모습을 가르킨 것이다. 그리하여 각행분상에 들어갈 수 있는 「나」, 시비이해 분별식심이 없는 자유인인 「나」로 환원될 수 있을 때 신앙의 행위는 완성 성취되는 것이다. 진리신앙은 각행분상을 믿는 것이라고 초보자들에게 소박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사은신앙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가 그 무엇 하나도 「나」대로 「나」만이 행해질 수 없다라고 보고 모든 타자들을 고맙게 감지하는 일이다.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철저한 감지는 모든 타자와의 인연연기 관계를 절감하는 진리신앙의 영역에 들어가는 체험이다. 이런 점에서 일원 즉 사은이요 사은 즉 일원이다.
일원 즉 사은이요 사은 즉 일원이라는 감지에 도달한 신앙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남다른 수행조건을 실행하는 것으로서 주위 사람들을 감화시킨다. 교화의 방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원 즉 사은이요 사은 즉 일원의 합일된 체감을 위해 정진하는 모습에서 그대로 주위는 감화되기 때문이다. 이를 진리적 종교의 신앙에 근거한 사실적 도덕의 수행자라고 바꾸어 말할수도 있다.
첫째, 진리적 종교의 신앙자는 윤리, 도덕을 항상 그 시대 그 인간들에 맞게 실현하기 위해 상생상화의 기운을 불러 일으킨다.
둘째, 진리적 종교의 신앙자는 항상 자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깊은 참회가 행해지고 있다.
셋째, 진리적 종교를 신앙하는 자는 모든 경험과 지식을 집중하여 막히고 가리워진 대상들을 소통하며 넘치는 자나 미달된 자를 자기의 능력으로 절장보단한다.
넷째, 진리적 종교의 신앙자는 남 모르는 인고의 수행을 감행하여 항상 타인의 잘못을 나무람 하기 전에 그들 앞에 떳떳한 그리고 소박한 심혼으로서 무애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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