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종교의 과제
종교와 가정
인생 보금자리로서의 가정
보은과 상봉하솔의 윤리 바로 세우고
가정유형의 유지기능 종교가 지녀야
제3의 물결의 여파

「1930년대의 대공황 시대에는 수백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 흘렀다. 공장은 폐쇄되고 해고통지를 손에 쥔 실업자들은 절망의 바닥에 빠져 자책하며 자기 자신을 잃어 갔다. ...오늘날 또다시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금 죄악감에 괴로워 하는 것은 경제적 파멸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가정의 붕괴가 원인이다. 가정의 붕괴라는 현대적 문제는 산업주의의 위기라는 일반적 위기상황의 일부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앨빈 토플러 著, 제3의 물결에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 여러나라에서 가정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 같다. 「카터」미 대통령이 「정부가 당면한 최우선의 과제는 가족제도를 보호하는 정책을 세우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는 가정에 대한 「토플러」의 표현이 결코 과장된 우려가 아님을 뒷받침 해준다.
또 1983년 10월28일자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가족의 재구축을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루면서 「정신적 황폐로 인한 가정상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도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정이 당면한 사정은 「토플러」의 지적처럼 그렇게 비극적인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정보호라는 용어가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면 가정문제가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정 붕괴나 가정상의 혼란은 가정의 변화를 의미한다. 가정의 변화는 주로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활형태가 바뀌어짐에 따라 가족의 구성이나 역할, 가정의 기능등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변화가 사회발전에 저해가 될 때에 그것은 가정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변화하는 가정상
오늘날 가정의 변화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정 내에서 부부간의 역할문제이다.
부부간의 역할 변화는 우리가 직접 피부로 느끼는 점이다. 전통적인 가정에 있어서 부부의 역할은 엄격하게 구분되었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대표하며 경제를 책임지고 가정의례를 주관함으로써 가정의 중심적 지위에 있었다.
이에 대해 아내는 집안일과 육아, 그리고 남편에 대한 내조가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부부의 역할 분담은 산업사회의 등장과 함께 변화되고 있다. 가정에 대한 경제적 책임은 이제 남편의 고유 영역은 아니다. 아내도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서 가정경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가정경제에 대한 아내의 역할이 증대된 것은 상대적으로 가정 내에서의 아내의 위치를 격상시켰다고 보아진다. 동시에 아내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제 소위 「집만을 지키는 아내」는 아닌 것이다.
부부의 역할 변화와 함께 두드러진 또 하나의 변화는 가족형태상의 문제이다. 가족의 형태는 각 사회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상이성에 의하여 그 구조가 다르게 나타난다.
「머독(Murdoc)」이라는 학자는 가족의 형태를 ①핵가족 ②확대가족 ③복합가족으로 구분한다. 그는 확대가족을 다시 부계동거가족, 모계동거가족, 쌍계동거가족으로 나누고 복합가족은 일부다처가족, 일처다부가족, 집단혼가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가족수효의 多寡에 따라 5인 이하를 소가족, 6인 이상을 대가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부계동거가족의 확대가족 또는 대가족 형태였다. 그런데 공업화와 함께 소가족화하고 있다. 소가족화 현상을 우리는 흔히 핵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서구에서 사용되는 핵가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핵가족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40년대 미국에서였다고 한다. 핵가족의 의미는 ①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부모의 의견을 배제하며 ②부모에 대한 봉양의 의무를 지지않고 ③부모는 결혼한 자녀에 대하여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으며 ④가족은 4인 이내로 주부는 반드시 가정을 지키고 자녀의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핵가족은 「독립성의 유지」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부모와의 관계등 윤리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붕괴되는가
가정상의 변화는 가정의 본질이나 기능상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퇴니스(Tonies)」의 표현대로 가족은 원래 자연발생적으로 정해진 공동사회였지만 핵가족의 출현으로 이제는 이익사회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독특하게 발현되는 양보와 협동, 가족을 위한 희생보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발전하게 된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자녀들에게서부터 싹터 오른다. 자녀가 많은 가정은 상호 갈등을 경험하게 되고 또 그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양성하게 되어 원만한 성품을 기를 수 있다. 동시에 사회적응력도 높아진다. 그러나 1인이나 2인의 자녀는 부모의 과잉보호에 의해 모험심이 적고 극히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 형성된다. 환경적응력도 저하된다. 여기에 물량적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청소년 문제를 야기한다.
핵가족화 경향에서 노인문제가 제기되고 상봉의 도를 잃어 간다. 주부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가정교육이 소홀해진다. 가정교육의 소홀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인성문제가 도외시 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내의 경제적 자립이나 자녀수가 적은 것도 문제가정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어느 지방 경찰국 집계는 20세 이상 가출인중 주부가 70%나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가정사는 주부의 것」이라는 전통적 관념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토플러」가 지적한 가정의 붕괴는 핵가족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데에 현대 가정의 심각성이 있다.
보호돼야 할 가정
우리나라의 가정은 아직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핵가족 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가정의 전통적 기능은 이미 변화되고 부부간의 역할관계도 크게 달라졌다. 가족형태는 점차 핵가족화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핵가족화의 다음단계는 선진 서구의 여러 나라가 겪는 것처럼 가정 붕괴의 길 될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됐지만 가정교육의 부재로 일어나는 청소년 문제, 부모봉양에 대한 거부감, 여성의 사회활동 증대로 인한 가정 분위기의 변화, 문제가정의 증가등은 가정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현상들이라고 하겠다.
로마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가정 붕괴였다고 하는 지적이 있다. 부모가 찰라적 쾌락에 탐닉하는 동안 자녀들은 노예에 의하여 양육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노예는 아니지만 부모의 따뜻한 품을 떠나 자라는 자녀들은 얼마나 많을까.
가정 붕괴는 사회파멸과 함수적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가정은 보호돼야 한다.
사회학자들은 사회의 유형유지를 종교기능의 하나로 손꼽는다. 만일 이러한 견해가 타당하다면 가정의 유형이 유지되도록 하는 기능도 종교가 지녀야 한다. 가정의 기능이라든가 가족형태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하여도 관심을 갖고 가정교화의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가정관의 확립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원불교적인 의미에서의 가정은 보은에의 보금자리라고 하겠다. 결혼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력이 확보되었음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의식일 것이다. 결혼으로 시작된 가정에서는 부모에 대한 봉양, 자녀의 양육, 가정과 주부로서의 역할수행, 사회적 책임등이 주어진다. 이러한 책임은 그동안의 피은에 대한 보은의 도리로서 이해된다.
가정은 또 소중한 인연의 만남이다. 가족은 오늘의 「나」가 있기까지의 모든 전생을 통하여 가장 깊은 인연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연을 상생으로 지속하려는 신앙적 노력이 가정에서는 이루어져야 한다.
대종사께서는 가정은 한 나라를 축소하여 놓은 곳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건전한 가정은 곧 부강한 국가, 평화스러운 국가로 이어진다고 하겠다.
종교는 항상 시대를 향도하는 등불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가정문제에 종교는 사회구제의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가정보호를 위한 신앙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라고 느껴진다.
종교와 사회   심 도 정(교무 ㆍ 원광대 교학대 교수)
바람직한 사회통합적 기능
진정한 종교전달자 민중임을 일깨워
사회적 종교공동체 평화건설에 공헌
처음에
수운, 증산, 소태산으로 연결되는 한국 신흥종교 운동의 맥락은 종교가 사회 속에서 민중을 바탕으로 있어진다는 것을 증험해 준다. 「하비 콕스」도 진정한 종교의 전달자는 민중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숨결은 민중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지식인의 것, 지배자의 것으로 편입된 사회에서는 자칫 체제유지의 시녀로 전락하기 마련이고 「칼 막스」가 지적한대로 민중을 달래는 아편일수도 있는 것이다.
기능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는 사회통합의 기능과 개인의 심리적 보상기능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성원의 생활이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정신적 기반이 혼란에 직면했을 때는 사회해체의 역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한국 신흥종교의 발생은 이상의 논리에 따른 필연적 소산인 것이다.
최수운과 한국사회
최수운이 태어난 것은 이조 순조 24년 1824년 경주 가정리이다. 6세에 모친을 여의고 16세에 부친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된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지마는 양반의 서출로 태어났으므로 벼슬길이 막히고 농사 일마저 뜻이 없어 36세까지 각지를 돌아 다닌다.
이해에 고향 용담정으로 돌아와 이름을 제우라 고치고 두문불출한다.
이듬해 1860년 그의 나이 37세에 「한울님」의 계시를 받고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최수운의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로 당시 한국사회에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하나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라는 것이다. 당시 적서의 차별과 반상의 차별이 심하였던 상황에서 계급타파와 인권존중의 사상을 선포한 것이다.
2대 교주 최해월은 1888년 각지 동학교도들에게 보낸 內修道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안 모든 사람을 한울님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가축들을 학대하지 마라」「일체 모든 사람을 한울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고 하고 어린 아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니라」 3대 교주 손의암은 이를 인내천 사상으로 교의를 편정하였다.
둘은 영부와 주문으로써 질병을 다스리고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힘을 불어넣어준 점이다. 당시 괴질이 만연하여 순조 33년에도 길에 시체가 즐비하였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민생의 도탄은 가난과 질병과 압제가 주범이다. 고난극복의 희소식이 전해졌을 때 삼남지방의 백성들이 속속들이 동학에 귀의하였던 것이다.
셋은 유 ㆍ 불 ㆍ 선 삼교합일의 무극대도를 제창한 점이다. 서학(천주교)에 대한 동학(천도교)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자주의 정신을 고양시켰다.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양척왜의 깃발을 내걸고 1894년의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1919년의 3.1운동에는 교주와 주요간부들이 참여 하였다.
강증산과 한국사회
강증산은 1871년 동학혁명의 시발지인 전북 고부군 객망리(정읍군 덕천면)에서 태어난다. 그의 14대 선조가 이조참의겸 도승지를 지냈다고 하나 낙향한 양반의 후예로서 경제적으로는 하류계급에 속한다.
어려서 서당에 나가 한문수학을 하였지만 14 ㆍ 5세부터는 학업을 중단하고 일시 머슴살이와 나무꾼 노릇을 한다.
그가 24세 되는 1894년 갑오동학 혁명이 일어난다. 혁명군을 따라 그는 남원, 임실, 전주, 여산, 청주, 공주등지로 종군하면서도 싸움에는 가담하지 않고 대세를 관망하기만 한다. m가 예언한대로 싸움이 실패로 끝나자 1897년부터 1900년까지 황해, 평안, 함경, 강원, 경상등지로 주류천하 한다.
3년동안 그는 각지의 흉흉한 인심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목도하고 김경소로부터 태을주를, 김일부로부터 정역사상을 섭렵하였으며 치병과 예언의 술객들을 만나기도 한다.
31세에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정진 끝에 천지대도를 성도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최수운 사상에서 드러난 인존사상과 病劫을 다스리는 묘방외에도 해원사상과 천지공사를 들 수 있다.
증산이 바라다 본 사회상은 수운과 마찬가지로 차별과 억압과 병겁이 휩쓰는 천하대란의 시기였다. 증산은 선천의 상극의 장에서 맺힌 원한을 풀고 후천선경의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증산 자신이 해원신이 되어 액운공사, 세운공사, 신명공사등을 실시하는 대무당임을 자처하였다.
이 모든 것이 비과학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허구일지라도 동학운동의 새로운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 해원상생의 윤리는 당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무정부 상태의 국가와 민족에게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 준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 민족의 혼을 찾는 메아리가 증산운동의 숨결속에서 들려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원불교와 한국사회
원불교는 1926년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에 의하여 전남 영광에서 창건 되었다. 그는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등 최초법어를 통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의 구원을 말하였다.
소태산은 그의 9인 제자들과 더불어 1917년에는 저축조합 운동을 1918년에는 방언공사를 1919년에는 산상기도를 하였다.
원불교 창립정신으로 불리우는 이때의 행적들은 근검저축, 일심단결, 무아봉공의 정신으로 실현되었다. 즉 물질개발, 정신계발, 사회봉공의 3대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저축조합 운동은 금주단연, 허례폐지, 미신타파, 매시미저축, 공동출역, 마음대조등 물질, 육신, 정신훈련으로 오늘날 지역사회 조직사업이었으며 방언공사는 길룡리에 해면의 간석지를 맨손으로 막아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전개한 것이며 산상기도는 장차 9인 제자들로 하여금 작은 마을의 일꾼에서 국가 세계사업의 큰 일꾼 만들기 위한 일대 경륜이었다.
소태산은 곧 「조선불교 개선론」을 발표하여 불법을 시대의 것, 생활의 것, 대중의 것으로 만들었다. 경전을 쉬운 대중의 말로 편찬하고 교당을 신자의 집중지에 세우며 직업을 갖고 생활속에서 불법을 닦게 하며 예법을 실질에 맞게 간소화 시켰다.
소태산은 「과거 조선사회의 결함조목」을 개선하여 남녀평등, 계급평등, 지식평등, 생활평등이 되게하고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의 사요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는 총부를 전북 익산으로 옮기고 주경야독,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생활과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등 공부법으로 일제의 압제에서도 새 종교, 새 생활운동으로써 민족 개조운동, 새 역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교화, 교육, 자선사업을 교단의 3대지표로 세우고 훈련과 산업을 일으켰다. 8.15 민족고아복의 날을 맞아 제2대 정산종사는 건국론을 저술하고 건국 3대 사업을 펼쳤다. 열반에 당하여 정산종사는 삼동윤리를 천명하였으며 원불교가 민족의 종교임과 동시에 세계의 종교임을 재확인 하였다.
종교와 사회
지금까지 한국종교와 한국사회에 대해서만 언급한 셈이다. 불교, 유교, 천주교, 기독교가 펼친 역사와 민족에의 공헌을 외면 하였다. 오늘의 교회가 개인의 갈증을 풀어 주고 지역사회의 욕구에 응답하는 공동체로서 국가 세계의 평화건설에 이바지 하는 인간의 종교, 지상의 종교이어야 함을 강조했을 뿐이다.
세계 3대종교의 발생지인 당시의 인도 중국 유태사회는 사회성원의 다수가 긂주리고 병드록 억압 받는 상태에서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세상이 말세가 되고 험난한 때를 당하면 반드시 구세성자가 나타나서 세상을 바로 잡고 인심을 골라 놓는다」고 소태산 대종사는 말씀 하였다.
원불교가 더욱 인간의 종교, 사회의 종교이기 위해서는 교화, 교육, 자선의 3대 사업을 보다 사회봉사적 기능으로 폭넓게 전환하여야 한다. 한국 개신교가 처음부터 의료사업으로 시작된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교당과 사회, 사회와 교당간의 중간영역이 설정되어야 하며 종교가 울타리를 트고 사회의 광장에 나설 수 있는 교역자를 배출시켜야 한다. 이것의 적절한 시설이 사회복지 회관이고 사회교육, 사회봉사의 교역자가 요청된다.
종교와 정치   한 정 원(법사 ㆍ 원광대 교학대학장)
종교인의 현실대응적 자세
종교본분 다하는 것으로 정치에 기여
정교동심의 명제, 동남풍 서북풍 비유
종교인은 정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종교인은 어떻게 사회참여할 것인가? 어떻게 정치에 관심을 둘 것인가?
이 문제는 간단히 해답하기 어려운 것이면서 과거와 달리 선명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될때가 왔다. 왜냐하면 종교가 자기교회 안에서 안주하는 시대와는 달리 사회에 영향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요망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세상에 출현하게 되는 것은
종교자체의 유지보호만을 받기 위해 나온것은 아니다. 오직 아노미(Anomie) 상태에 있는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출현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종교학 第一課에 속하는 상식이다.
그렇다면 종교인은 정치에 어떻게 대응하여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종교는 사실상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지배하 주인을 잃은 암흑의 땅에 그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인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은 마침내 원불교를 창건하게까지 되나 직접적인 정치활동이나 민족운동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시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법문은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최초법어」에서 동양의 전통사상이며 가장 원숙한 현실타개의 원리인 대학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오늘날 현실에 맞도록 변형하여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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