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종교의 과제
종교와 가정
인생 보금자리로서의 가정
보은과 상봉하솔의 윤리 바로 세우고
가정유형의 유지기능 종교가 지녀야
제3의 물결의 여파

「1930년대의 대공황 시대에는 수백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 흘렀다. 공장은 폐쇄되고 해고통지를 손에 쥔 실업자들은 절망의 바닥에 빠져 자책하며 자기 자신을 잃어 갔다. ...오늘날 또다시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금 죄악감에 괴로워 하는 것은 경제적 파멸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가정의 붕괴가 원인이다. 가정의 붕괴라는 현대적 문제는 산업주의의 위기라는 일반적 위기상황의 일부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앨빈 토플러 著, 제3의 물결에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 여러나라에서 가정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 같다. 「카터」미 대통령이 「정부가 당면한 최우선의 과제는 가족제도를 보호하는 정책을 세우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는 가정에 대한 「토플러」의 표현이 결코 과장된 우려가 아님을 뒷받침 해준다.
또 1983년 10월28일자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가족의 재구축을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루면서 「정신적 황폐로 인한 가정상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도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가정이 당면한 사정은 「토플러」의 지적처럼 그렇게 비극적인 것은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정보호라는 용어가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면 가정문제가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정 붕괴나 가정상의 혼란은 가정의 변화를 의미한다. 가정의 변화는 주로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활형태가 바뀌어짐에 따라 가족의 구성이나 역할, 가정의 기능등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변화가 사회발전에 저해가 될 때에 그것은 가정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변화하는 가정상
오늘날 가정의 변화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정 내에서 부부간의 역할문제이다.
부부간의 역할 변화는 우리가 직접 피부로 느끼는 점이다. 전통적인 가정에 있어서 부부의 역할은 엄격하게 구분되었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대표하며 경제를 책임지고 가정의례를 주관함으로써 가정의 중심적 지위에 있었다.
이에 대해 아내는 집안일과 육아, 그리고 남편에 대한 내조가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부부의 역할 분담은 산업사회의 등장과 함께 변화되고 있다. 가정에 대한 경제적 책임은 이제 남편의 고유 영역은 아니다. 아내도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서 가정경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가정경제에 대한 아내의 역할이 증대된 것은 상대적으로 가정 내에서의 아내의 위치를 격상시켰다고 보아진다. 동시에 아내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제 소위 「집만을 지키는 아내」는 아닌 것이다.
부부의 역할 변화와 함께 두드러진 또 하나의 변화는 가족형태상의 문제이다. 가족의 형태는 각 사회의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상이성에 의하여 그 구조가 다르게 나타난다.
「머독(Murdoc)」이라는 학자는 가족의 형태를 ①핵가족 ②확대가족 ③복합가족으로 구분한다. 그는 확대가족을 다시 부계동거가족, 모계동거가족, 쌍계동거가족으로 나누고 복합가족은 일부다처가족, 일처다부가족, 집단혼가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가족수효의 多寡에 따라 5인 이하를 소가족, 6인 이상을 대가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부계동거가족의 확대가족 또는 대가족 형태였다. 그런데 공업화와 함께 소가족화하고 있다. 소가족화 현상을 우리는 흔히 핵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서구에서 사용되는 핵가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핵가족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40년대 미국에서였다고 한다. 핵가족의 의미는 ①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부모의 의견을 배제하며 ②부모에 대한 봉양의 의무를 지지않고 ③부모는 결혼한 자녀에 대하여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으며 ④가족은 4인 이내로 주부는 반드시 가정을 지키고 자녀의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핵가족은 「독립성의 유지」라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부모와의 관계등 윤리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붕괴되는가
가정상의 변화는 가정의 본질이나 기능상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퇴니스(Tonies)」의 표현대로 가족은 원래 자연발생적으로 정해진 공동사회였지만 핵가족의 출현으로 이제는 이익사회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독특하게 발현되는 양보와 협동, 가족을 위한 희생보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발전하게 된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자녀들에게서부터 싹터 오른다. 자녀가 많은 가정은 상호 갈등을 경험하게 되고 또 그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양성하게 되어 원만한 성품을 기를 수 있다. 동시에 사회적응력도 높아진다. 그러나 1인이나 2인의 자녀는 부모의 과잉보호에 의해 모험심이 적고 극히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 형성된다. 환경적응력도 저하된다. 여기에 물량적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청소년 문제를 야기한다.
핵가족화 경향에서 노인문제가 제기되고 상봉의 도를 잃어 간다. 주부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가정교육이 소홀해진다. 가정교육의 소홀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인성문제가 도외시 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내의 경제적 자립이나 자녀수가 적은 것도 문제가정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어느 지방 경찰국 집계는 20세 이상 가출인중 주부가 70%나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가정사는 주부의 것」이라는 전통적 관념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토플러」가 지적한 가정의 붕괴는 핵가족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데에 현대 가정의 심각성이 있다.
보호돼야 할 가정
우리나라의 가정은 아직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핵가족 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가정의 전통적 기능은 이미 변화되고 부부간의 역할관계도 크게 달라졌다. 가족형태는 점차 핵가족화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핵가족화의 다음단계는 선진 서구의 여러 나라가 겪는 것처럼 가정 붕괴의 길 될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됐지만 가정교육의 부재로 일어나는 청소년 문제, 부모봉양에 대한 거부감, 여성의 사회활동 증대로 인한 가정 분위기의 변화, 문제가정의 증가등은 가정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현상들이라고 하겠다.
로마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가정 붕괴였다고 하는 지적이 있다. 부모가 찰라적 쾌락에 탐닉하는 동안 자녀들은 노예에 의하여 양육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노예는 아니지만 부모의 따뜻한 품을 떠나 자라는 자녀들은 얼마나 많을까.
가정 붕괴는 사회파멸과 함수적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가정은 보호돼야 한다.
사회학자들은 사회의 유형유지를 종교기능의 하나로 손꼽는다. 만일 이러한 견해가 타당하다면 가정의 유형이 유지되도록 하는 기능도 종교가 지녀야 한다. 가정의 기능이라든가 가족형태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하여도 관심을 갖고 가정교화의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가정관의 확립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원불교적인 의미에서의 가정은 보은에의 보금자리라고 하겠다. 결혼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력이 확보되었음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의식일 것이다. 결혼으로 시작된 가정에서는 부모에 대한 봉양, 자녀의 양육, 가정과 주부로서의 역할수행, 사회적 책임등이 주어진다. 이러한 책임은 그동안의 피은에 대한 보은의 도리로서 이해된다.
가정은 또 소중한 인연의 만남이다. 가족은 오늘의 「나」가 있기까지의 모든 전생을 통하여 가장 깊은 인연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연을 상생으로 지속하려는 신앙적 노력이 가정에서는 이루어져야 한다.
대종사께서는 가정은 한 나라를 축소하여 놓은 곳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건전한 가정은 곧 부강한 국가, 평화스러운 국가로 이어진다고 하겠다.
종교는 항상 시대를 향도하는 등불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가정문제에 종교는 사회구제의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가정보호를 위한 신앙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라고 느껴진다.
종교와 사회   심 도 정(교무 ㆍ 원광대 교학대 교수)
바람직한 사회통합적 기능
진정한 종교전달자 민중임을 일깨워
사회적 종교공동체 평화건설에 공헌
처음에
수운, 증산, 소태산으로 연결되는 한국 신흥종교 운동의 맥락은 종교가 사회 속에서 민중을 바탕으로 있어진다는 것을 증험해 준다. 「하비 콕스」도 진정한 종교의 전달자는 민중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숨결은 민중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지식인의 것, 지배자의 것으로 편입된 사회에서는 자칫 체제유지의 시녀로 전락하기 마련이고 「칼 막스」가 지적한대로 민중을 달래는 아편일수도 있는 것이다.
기능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는 사회통합의 기능과 개인의 심리적 보상기능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성원의 생활이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정신적 기반이 혼란에 직면했을 때는 사회해체의 역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한국 신흥종교의 발생은 이상의 논리에 따른 필연적 소산인 것이다.
최수운과 한국사회
최수운이 태어난 것은 이조 순조 24년 1824년 경주 가정리이다. 6세에 모친을 여의고 16세에 부친마저 별세하여 고아가 된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지마는 양반의 서출로 태어났으므로 벼슬길이 막히고 농사 일마저 뜻이 없어 36세까지 각지를 돌아 다닌다.
이해에 고향 용담정으로 돌아와 이름을 제우라 고치고 두문불출한다.
이듬해 1860년 그의 나이 37세에 「한울님」의 계시를 받고 동학을 창도하게 된다. 최수운의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로 당시 한국사회에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하나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라는 것이다. 당시 적서의 차별과 반상의 차별이 심하였던 상황에서 계급타파와 인권존중의 사상을 선포한 것이다.
2대 교주 최해월은 1888년 각지 동학교도들에게 보낸 內修道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안 모든 사람을 한울님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가축들을 학대하지 마라」「일체 모든 사람을 한울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고 하고 어린 아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니라」 3대 교주 손의암은 이를 인내천 사상으로 교의를 편정하였다.
둘은 영부와 주문으로써 질병을 다스리고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힘을 불어넣어준 점이다. 당시 괴질이 만연하여 순조 33년에도 길에 시체가 즐비하였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민생의 도탄은 가난과 질병과 압제가 주범이다. 고난극복의 희소식이 전해졌을 때 삼남지방의 백성들이 속속들이 동학에 귀의하였던 것이다.
셋은 유 ㆍ 불 ㆍ 선 삼교합일의 무극대도를 제창한 점이다. 서학(천주교)에 대한 동학(천도교)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자주의 정신을 고양시켰다.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양척왜의 깃발을 내걸고 1894년의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1919년의 3.1운동에는 교주와 주요간부들이 참여 하였다.
강증산과 한국사회
강증산은 1871년 동학혁명의 시발지인 전북 고부군 객망리(정읍군 덕천면)에서 태어난다. 그의 14대 선조가 이조참의겸 도승지를 지냈다고 하나 낙향한 양반의 후예로서 경제적으로는 하류계급에 속한다.
어려서 서당에 나가 한문수학을 하였지만 14 ㆍ 5세부터는 학업을 중단하고 일시 머슴살이와 나무꾼 노릇을 한다.
그가 24세 되는 1894년 갑오동학 혁명이 일어난다. 혁명군을 따라 그는 남원, 임실, 전주, 여산, 청주, 공주등지로 종군하면서도 싸움에는 가담하지 않고 대세를 관망하기만 한다. m가 예언한대로 싸움이 실패로 끝나자 1897년부터 1900년까지 황해, 평안, 함경, 강원, 경상등지로 주류천하 한다.
3년동안 그는 각지의 흉흉한 인심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목도하고 김경소로부터 태을주를, 김일부로부터 정역사상을 섭렵하였으며 치병과 예언의 술객들을 만나기도 한다.
31세에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정진 끝에 천지대도를 성도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최수운 사상에서 드러난 인존사상과 病劫을 다스리는 묘방외에도 해원사상과 천지공사를 들 수 있다.
증산이 바라다 본 사회상은 수운과 마찬가지로 차별과 억압과 병겁이 휩쓰는 천하대란의 시기였다. 증산은 선천의 상극의 장에서 맺힌 원한을 풀고 후천선경의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증산 자신이 해원신이 되어 액운공사, 세운공사, 신명공사등을 실시하는 대무당임을 자처하였다.
이 모든 것이 비과학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허구일지라도 동학운동의 새로운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 해원상생의 윤리는 당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무정부 상태의 국가와 민족에게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어 준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 민족의 혼을 찾는 메아리가 증산운동의 숨결속에서 들려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원불교와 한국사회
원불교는 1926년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에 의하여 전남 영광에서 창건 되었다. 그는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등 최초법어를 통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의 구원을 말하였다.
소태산은 그의 9인 제자들과 더불어 1917년에는 저축조합 운동을 1918년에는 방언공사를 1919년에는 산상기도를 하였다.
원불교 창립정신으로 불리우는 이때의 행적들은 근검저축, 일심단결, 무아봉공의 정신으로 실현되었다. 즉 물질개발, 정신계발, 사회봉공의 3대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저축조합 운동은 금주단연, 허례폐지, 미신타파, 매시미저축, 공동출역, 마음대조등 물질, 육신, 정신훈련으로 오늘날 지역사회 조직사업이었으며 방언공사는 길룡리에 해면의 간석지를 맨손으로 막아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전개한 것이며 산상기도는 장차 9인 제자들로 하여금 작은 마을의 일꾼에서 국가 세계사업의 큰 일꾼 만들기 위한 일대 경륜이었다.
소태산은 곧 「조선불교 개선론」을 발표하여 불법을 시대의 것, 생활의 것, 대중의 것으로 만들었다. 경전을 쉬운 대중의 말로 편찬하고 교당을 신자의 집중지에 세우며 직업을 갖고 생활속에서 불법을 닦게 하며 예법을 실질에 맞게 간소화 시켰다.
소태산은 「과거 조선사회의 결함조목」을 개선하여 남녀평등, 계급평등, 지식평등, 생활평등이 되게하고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의 사요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는 총부를 전북 익산으로 옮기고 주경야독,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생활과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등 공부법으로 일제의 압제에서도 새 종교, 새 생활운동으로써 민족 개조운동, 새 역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교화, 교육, 자선사업을 교단의 3대지표로 세우고 훈련과 산업을 일으켰다. 8.15 민족고아복의 날을 맞아 제2대 정산종사는 건국론을 저술하고 건국 3대 사업을 펼쳤다. 열반에 당하여 정산종사는 삼동윤리를 천명하였으며 원불교가 민족의 종교임과 동시에 세계의 종교임을 재확인 하였다.
종교와 사회
지금까지 한국종교와 한국사회에 대해서만 언급한 셈이다. 불교, 유교, 천주교, 기독교가 펼친 역사와 민족에의 공헌을 외면 하였다. 오늘의 교회가 개인의 갈증을 풀어 주고 지역사회의 욕구에 응답하는 공동체로서 국가 세계의 평화건설에 이바지 하는 인간의 종교, 지상의 종교이어야 함을 강조했을 뿐이다.
세계 3대종교의 발생지인 당시의 인도 중국 유태사회는 사회성원의 다수가 긂주리고 병드록 억압 받는 상태에서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세상이 말세가 되고 험난한 때를 당하면 반드시 구세성자가 나타나서 세상을 바로 잡고 인심을 골라 놓는다」고 소태산 대종사는 말씀 하였다.
원불교가 더욱 인간의 종교, 사회의 종교이기 위해서는 교화, 교육, 자선의 3대 사업을 보다 사회봉사적 기능으로 폭넓게 전환하여야 한다. 한국 개신교가 처음부터 의료사업으로 시작된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교당과 사회, 사회와 교당간의 중간영역이 설정되어야 하며 종교가 울타리를 트고 사회의 광장에 나설 수 있는 교역자를 배출시켜야 한다. 이것의 적절한 시설이 사회복지 회관이고 사회교육, 사회봉사의 교역자가 요청된다.
종교와 정치   한 정 원(법사 ㆍ 원광대 교학대학장)
종교인의 현실대응적 자세
종교본분 다하는 것으로 정치에 기여
정교동심의 명제, 동남풍 서북풍 비유
종교인은 정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종교인은 어떻게 사회참여할 것인가? 어떻게 정치에 관심을 둘 것인가?
이 문제는 간단히 해답하기 어려운 것이면서 과거와 달리 선명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될때가 왔다. 왜냐하면 종교가 자기교회 안에서 안주하는 시대와는 달리 사회에 영향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요망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세상에 출현하게 되는 것은
종교자체의 유지보호만을 받기 위해 나온것은 아니다. 오직 아노미(Anomie) 상태에 있는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출현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종교학 第一課에 속하는 상식이다.
그렇다면 종교인은 정치에 어떻게 대응하여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종교는 사실상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지배하 주인을 잃은 암흑의 땅에 그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인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은 마침내 원불교를 창건하게까지 되나 직접적인 정치활동이나 민족운동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시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법문은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최초법어」에서 동양의 전통사상이며 가장 원숙한 현실타개의 원리인 대학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오늘날 현실에 맞도록 변형하여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 준비할 요법이라 하여 현실에 대처해 나간 점은 종교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놀라운 방법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종래 불교인들이 한때 정치의 시녀노릇만 해왔던 때나 마호멧트 교도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종교인의 태도와 달리 종교인의 처지에 맞는 정치 문제를 관심두며 현실문제에 원숙한 대처를 기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노인종교의 정치적 관심
원불교에 있어 정치참여에 문제점을 찾기 전에 먼저 우리 주변의 노대종교들이 정치에 어떠한 관심을 두며 참여해 왔던가를 간단하게나마 밝혀보고 다시 원불교의 입장을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듯 하다.
한국역사에 있어 유교와 불교가 가장 큰 사상적 배경이 되어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중에 먼저 유교부터 찾아보기로 하자. 중국 봉건시대의 중심종교인 유교는 周室이 망하던 현실에 태어난 공자는 정치적 정도를 찾아나가는 것이 「군자」라 하여 백성들의 바른 지도강령을 인도적인 면에서 찾았다. 공자는 그의 나이 30세 후반에 혼란에 빠진 제후국을 바로잡기 위해 소위 철환천하에 나섰다. 이것은 전국시에 태어난 맹자에게도 동등하게 천하를 주유하며 양혜왕, 제선왕을 만난 소의이다. 이들은 국왕들에게 가장 권위있고 건전한 정치철학의 상담이었다. 정치인이 바른 식견으로 미중들에게 덕화를 베풀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후진시대를 거쳐 근세에 이르면서 유교인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국에 있어서는 사림파를 제외하고 대체로 유학인이 정치인처럼 되었다. 여기에 있어 종교적 이념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친족사회 중심의 붕당정치로 바꿔져서 원시유교의 본연사상과는 거리를 멀리 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불교는 어떠했나.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 자신이 정치하는 왕자이지만 그 정치적 권익을 헌신같이 버리고 현실의 제문제를 철저히 깨닫고 나서 정치적 권력자가 갖는 사바세계의 정치를 다스리는 사람은 부처님의 바른 지도를 받어야만 태평해진다고 밝혔다. 특히 부처님은 진리의 법륜을 굴리어 전 세계 인류를 정법으로 돌아오게 하며 바르게 다스리는 분이라고 본 점이다. 이것은 성현의 정치에 의해 세간의 정치도 함께 다스려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불교를 믿지 않는 정치사회인들 앞에는 하등 무의미한 전설에 불과하여 아무런 위력을 갖지 못한다고 보았다. 도리어 세속정치인들에게 불교를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는 시녀로까지 전락하게 되고 만다.
불교가 중국이나 한국에 공식적으로 들어온지 1800년 미만으로 수많은 척불, 폐불의 서러움을 받는때나 시녀화 하는 때가 없지 않았다. 이것은 불교의 본연정신을 놓고 정치의 직접 참여나 정치의 전혀 무관한 양극적 태도에 대한 이교설의 비판에서 기인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이 양극적 태도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말 한국사회에 순교와 저항으로 문을 연 기독교는 그 지향점이 신의 왕국(Kingdom of God)으로 신정을 이상으로 삼고 출범하였다. 특히 중세시대에 이 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로마 교황청은 교황이 직접 정치하는 나라 구실을 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이 교황청은 세속의 나라가 아니라 천국까지 지배한다는 종교적 긍지로 이룩했던 나라요 세속의 정치에 직접 관여해서는 않되도록 하는 방향의 전환으로 바꿔졌다.
이상으로 볼 때 노대종교들은 한 때 정치활동을 직접 행했던 때도 있기는 하나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점차 놓아지고 종교본연에 충실한 활동범위에서 정치에 관여했음을 요약하고 싶다.
다만 종교가 들어서 그 나라 그 사회에 건전하게 하는 선도적 역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종교가 한갓 부정정치에 저항만 해왔던 역사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도 종교인의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시행할 일이지만 종교인이 들어 사회에 부정심리만 넣어 준다면 이것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원불교의 정치적 관심
원불교 창건 69년중에 교시이신 소태산 대종사는 정치현실에 대한 솔직한 말씀을 지상에 발표한 것은 없다. 도리어 당신의 신분은 정치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내세웠다. 3.1운동 당시 당신의 행동이 내외제인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을 때 김태흡 화상과 그 제자들에게 「내가 만일 독립운동을 나선다면 삼천만 동포 전체가 내 운동에 참가하여 한데 뭉치게 할 자신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종교인임을 분명히 말한다」라고 강조하였음을(김태흡 스님의 추모담에서) 명시해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본분을 다하는 한계속에서 정치에 참여하라는 말씀으로 보고 싶다.
이 정신은 정산종사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조국이 해방된 후 어느 외빈이 정산종사에게 묻기를 조국이 해방괴어 건국을 서두르는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을 기대하는 물음을 물었다.
정산종사는 「정치인은 정치를 잘하는 것이 건국이지만 종교인은 종교의 맡은바에서 조국에 기여하는 것이 바로 건국이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지난날 정치와 종교를 혼동하여 함부로 날뛰거나 아부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정치와 종교가 철저히 유리되어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방법은 모두가 올바른 종교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형태에 속한다.
그러므로 정산종사는 그의 사대경륜 가운데 「정교동심」이라는 명제를 주었다. 정치와 종교가 가정의 엄부와 자모처럼 되어 서로 떠날 수 없는 원만한 관계를 이룰 때 바람직한 사회를 이룬다고 본 것이다.
엄부와 자모 즉 부와 모가 그 성격은 서로 다르고 방향이 다르지만 지향하는 관심사는 일치해야만 하듯이 이들이 기본적인 기능을 다해야만 건전한 국가 사회를 이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정치가 권모술수와 이합집산만을 일삼을 때 어떻게 정교동심이 되겠는가?란 의문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정교동심이어야 한다. 다만 동심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종교는 정치에 아첨도 아니요 비판도 아닌 올바른 동심점을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사회는 정화되기 마련이다.
또한 대종사는 정치와 법률을 비컨대 「서북풍」이 담당하였고 종교와 도덕은 「동남풍」이 맡은 격이라고 표현하여 우리는 동남풍이 될지언정 서북풍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동남풍과 서북풍은 어떻게 동심겸행한단 말인가가 문제이다.
종교, 도덕의 자비바람은 동남풍의 훈풍을 주재하는 것이라면 정치, 법률의 서북풍은 선, 악을 규제하는 정치, 법률의 엄한 바람이 세상을 주재하여 서로 상대하고 엇갈리게 사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자비훈풍도 법률을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동남풍을 주재하되 법다웁고 엄격한 바람이 부수적으로 필요하듯이 정치와 종교가 동심이 되어야 함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것이 정치와 종교가 동심이 되는 길인 것이다.
대산 종법사는 교리도에서 「제가의 요법」을 설명할 때 가정과 국가를 나누어 밝히고 있다. 그 중에 국가는 국민개진의 교화훈련과 국민개기의 부강운동이 있어야 「정교동심」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종교인인 동시에 사회인이기 때문에 정교동심의 이념을 세워 국가, 사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건전한 종교인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간의 대화   전 팔 근(법사 ㆍ 원광대 대학원장)
진리를 향한 인류 공동목표
종파주의적 높은 장벽을 뛰어 넘어서
세계라는 하나의 수레 낙원으로 인도
지난 5월6일 대산 종법사님께서는 서울 교황청 대사관에서 개최되었던 한국전통종교 지도자 대표들과 교황과의 접견에서 말씀하신 환영사 가운데 3대 제언을 하셨다. 종교연합(UR : United Religions)과 공동시장 개척, 심전계발 그것이였다. 이 3대 제언중에서도 가장 초점적 위치에 있는것이 UR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 제한된 시간내의 압축된 환영사에서 제안한 그 말씀이 과연 어느정도 교황의 가슴에 와 닿았으며 인상에 남았는가는 현재로서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교황의 진지했던 표정의 움직임을 직접 지켜보며 평소 주창해온 포부의 일단을 육성으로써 피력할 수 있었다.
또 대산 종법사님은 그 환영사 안에서 레이건 미 대통령의 중공방문은 정치적 동서의 만남이요 교황의 한국 방문은 종교적 동서의 만남으로 말씀하셨다. 이 위대한 정치적 대화, 종교적 대화는 이 세계라는 하나의 수레를 평화스런 낙원으로 운반해 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양바퀴와 같고 실로 밝아져 가는 세계의 하나의 실증으로 간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념의 주장에는 한치도 양보가 없었던 양진영이 서로 초청하고 거기에 응하여 대화의 광장을 마련했다는 것은 인류 정신개벽의 서광 같기도 하다.
장구한 전통과 절대적 신도수를 점유하여 타 종단위에 군림하고 있는 교황은 그 명칭자체부터 짙은 봉건적 냄새를 풍기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며 일부 신도들은 교황의 방한은 하나님 자신의 강림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이니 그가 점하고 있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가는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TV에서 접해본 교황이나 교황청 대사관에서 접해본 교황은 너무도 엄숙했던 접견실 주변의 분위기가 무안하리만큼 조용하고 점잖은 움직임 중에서도 가식없는 소박성과 성실함, 자애로운 인간미를 풍기고 있었다. 해맑은 얼굴에 약간 잡힌 주름은 신에의 봉사와 대화로서 일관된 긴 생애의 지혜를 새겨 주고 있는 듯 하였다. 거기에는 오만하지 않는 침착성과 과시하지 않는 친밀감이 있다.
교황을 맞이하는 우리 한국민의 태도도 각양각색이였다. 어떤 교단은 불가피 했던지 고의적이였던지 매우 무관심의 인상을 주었으며 교황과의 접견에 정식 대표를 파견하지도 않했던 것 같다. 전통 종교대표들도 대부분 매우 의례적인 태도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한 국민으로서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교황의 환영행사는 한 종교의 지도자의 차원은 벗어나 국가 차원의 행사같은 인상을 짙게 받았다.
과불급이 개부족이란 말이 있다. 우리 한민족이 때로 들어내는 과잉정열성, 자칫 주체성을 뒤로 밀어붙이는 사대주의적 맹목성이 이건 국제적 행사가 있을 때마다 피부에 느껴지는 것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과민의 탓이기를 바란다. 이번 교황환영 양상도 외지에서 읽은 모인국의 양상과는 너무도 반비례여서 주체성의 과잉 과시와 과잉 망각을 대조하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불교의 교황영접은 어디까지나 확고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국빈이나 교빈에 대하는 예를 그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한도내에서 다했다고 본다. 대산 종법사께서는 교황에 보내는 apt시지에서 교황이 타종단과의 대화의 문을 활짝 트려고한 노고에 대해 치하하고 약한 자에 대한 사랑을 찬양했으며 온 인류의 복지 생활을 위하고 세계평화 건설을 위해서는 모든 종단이 교리나 습관의 높은 울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신 바 있었다. 그리고 교황의 뜻이나 대산 종법사님의 뜻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임을 강조하시였다.
교황은 접견실에서 낭독한 거의 강론에서 한국에서 갖는 여러 만남중에서도 한국 전통종교 지도자 대표들과의 만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교황에게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계는 한 일터」를 이야기 함으로써 하나의 진리에 대한 이념을 주장한 것이다.
원불교의 종교연합에 관한 문제는 그간 국내적으로 수차 매스콤을 타기도 하였고 국제적으로도 기회있을 때마다 제시되여 왔다.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였던 아세아 종교자 대회의 분과회의에서 또 세계연방 종교자 회의에서도 다룬일이 있었고 팜플렛으로도 배포해 왔다. 누구도 이러한 제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너무도 거대한 문제여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표정들인 것이다. 또한 UR과 유사한 목적을 지닌 대소의 종교연합체가 기존해 있다는 사실도 있어서는 안되겠다. 우리와 연관을 가지고 있는 세계종교자 평화회의나 아세아 종교자 평화회의 세계연방 종교인협의회등 모두가 각종 종교인들이 서로 교의나 습관을 초월하여 세계평화 건설에 대동단결해 나가자는 대규모의 대회들중에 속하는 것이다. 그 규모에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목적에는 별차등이 없다. UR조직의 필요성을 논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종교연합체들이 기존하는데 새로운 조직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원불교가 말하는 종교연합체는 어디까지나 UN(국제연합)과 대등한 종교연합체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분야를 UN이 맡는다면 종교분야는 UR이 맡아서 상부상조하는 두 바퀴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UN이 세계평화를 교란시키는 자를 응징하는 엄부역할이라면 UR은 세계평화 건설에 공로있는 자를 표창하며 더욱 장려하고 인간의 근본정신부터 다스리고 이 지구상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만생령이 생을 즐길수 있도록 하는 자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가정의 엄부와 자모의 관계, 한 수레의 똑같은 두 바퀴, UN과 UR은 이러한 관계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물질과 정신이 불균형 상태로 되어 있는 하나의 조직체에 의해서 세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즉 종교가 UN기구내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지니고 있는 위대한 사명을 다하기에는 너무도 방치되어 버린 느낌이 든다. 종교가 횡포를 부리던 시대도 어둡고 비참했다. 반면 종교가 소외되는 세계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불균형에서 오는 불안정성 때문이다.
UN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기능의 약화상태는 하나의 큰 협조자의 출현으로서 가능할 것 같다. 그것이 즉 UN과 공동이념으로서 보조를 맞추어줄 UR의 출현일 것이다. 일찍이 대종사님께서도 언급하신 정교동심 이념은 UR의 창설과 그 선용으로써 더욱 빛을 보게 될 줄로 생각한다.
종교연합(UR)에 UN과 동등한 기능을 부여한다는 것은 결코 UN의 본래 권한을 제압하고 그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UR의 기능을 활용함으로써 UN의 기능을 가일층 활성화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수레바퀴로 밀고 나갔던 수레에 바퀴 하나를 더 달고 끌고 가는 원리이며 편부가 다스리든 가정에 자모가 동참하여 지금까지 등한시 되었던 역할을 맡아서 함으로써 평화스럽고 원만한 가정이 되는것과 같은 원리인 것이다. 세계의 국제경찰, 재판소 노릇을 하고 쾌도난마격으로 얽히고 설킨 국제분규를 처리해 줄 UN의 존재가 현재 무디어진 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모두 자기중심의 욕심과 아집으로 핏방울처럼 귀한 유류가 인명을 빼앗고 파괴하는데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도처에 격심해 가고 있는 포화, 뒤를 이은 경제적 파탄, 거기에 뒤따르는 마음의 불안등 산적해 가는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한 방법이 UR창설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교황의 방한과 더불어 한국에서 103명의 성인이 탄생한 것은 세계적인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피로써 신앙심을 바치는 어두운 세계가 다시 도래하지 않기를 염원하지 않을 수 없다. 103명의 시성식을 올리면서 교황은 앞으로 어떠한 세계를 예시했을 것인가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종교가 지니는 위대한 힘이 세계평화를 건설하고 인류복락의 근본이 되리라는 생각은 우리와 호리도 차이가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 유형의 종교연합체들도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 어떤 어슬픈 허점을 그대로 간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교황에게 환영사를 하신 대산 종법사님의 염원이 교황의 염원과 결합하여 하나의 위대한 결실을 맺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거대한 종교연합기구 창설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역사적인 정치적 동서의 만남도 물론이려니와 이번 교황의 방한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동서의 만남은 우리의 정성과 슬기로서 하나의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추진시켜 나가는 구체적인 방안이 앞으로 우리가 연구하고 모색해야 할 문제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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