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

1986년 12월 31일-마지막으로 남은 달력 한 장, 이제 이마저 뜯고 나면 별 수 없이 우리네가 사는 세상 그 어디에서나 제야의 종소리는 울리기 마련이고, 병인년 이 한해도 終焉을 고하게 된다.
올해를 올해라 하고 오늘을 오늘이라 하는 것도 시각과 運度의 국한 안에서만 奏效하는 것일까.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또한 오늘로 맞이하는 이 통속적인 관념의 되풀이 속에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살아오고 살아가는 인과적 변화의 연속성에는 어김이 없다. 어차피 우리네가 살아온 지난날은 그것이 잘 산 것이거나 잘못 산 것이거나 대개가 다 티끌이라 하고 꿈결이라 하고 變幻으로 虛像으로 비치고 반영되는 것은 오히려 빈 마음, 무엔가 마지못하며 아쉬워하는 인간의 常情이기도 하다.
누가 말했던가, 사람은 후회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면 살맛이 없으려니와 사는 보람도 없다. 무엇을 어떻게 후회하고 돌이켜보는가의 문제는 물론 그 삶의 질과 존재의 방법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자칫 의례적인 것이면서도 근원적인 것이며 더구나 사람은 그 언제 그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스스로 도덕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도덕적 존재에 이르기까지에는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가 하면 도무지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어느 모로나 사람은 그렇게 되어있다. 말하자면 자생적이다. 자발적이다. 그게 아니고는 살 수 없다. 그것이 설령 사람으로서는 알든 모르든, 當爲이든 無爲而化이든 사람 또는 중생이라는 진리가 본디에 그런 것이며 어질고 더욱 슬기롭다고 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중생, 신과 절대자는 반드시 이분법으로 나누어져 있고 분열과 대립 갈등으로 서로가 괴리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의 영원한 실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교화방편상의 부득이한 비유의 대상일 따름, 그리고 원천적으로는 선천 상극시대의 역사가 빚어낸 한판의 비극적 장면이다.
묵은해를 청산하고 다시 새해를 맞이하는 이 순간에 다다라서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나가는 우리네 일체 중생의 苦惱와 아픔과 黑闇의 첩첩장막은 올해뿐만이 아니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전 시대에도 금세기에도 이 역사적 공동 業障은 가벼워지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더해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 진실로 두려운 반역자의식의 타성은 이것을 숙명론적 기계론적 당위의 과제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이 엄연한 역리가 합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숙명적 산물도 아니며 기계적 존재일 수도 없다. 인간은 이 우주와 전체 생명으로 더불어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이며 이 우주사와 생명사와 세계사의 전일체계와 공동 질서 속에서 공존하고 더욱 서로가 서로의 「共尊」하는 삶의 인격을 확인하면서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정녕 우리들 일체 중생의 원력은 전 우주와 더불어 한결같은 동체대비의 큰 은혜요, 큰 사랑이면서도 오늘날의 그것은 어느 틈엔가 이다지도 엄청나게 갈라지고 지리멸렬 되어 그리도 해와 같이 밝고 뚜렷한 얼굴을 몰라보게 딴판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무지, 기아, 질병, 핵무기, 전쟁, 강약과 이데올로기의 갈등, 동서분열, 남북단절의 세기적 극한상황은 그 누구의 뜻이며 그 누구의 탓이겠는가. 저희들이 저지른 이 역사악 이 共業의 범죄를 저마다 아파하고 뉘우치며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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