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하고 개벽하는 이가 아니면

원기 72년 1월 1일 ― 새해 새 아침이 밝아왔다. 오늘 아침 밝아온 해는 어제 아침에 떠오른 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건마는 어제의 해를 묵은 해라 하고 오늘 아침 떠오른 해를 새 해라 한다 하니 이것이 다 살아있는 마음이 아니면 못할 일이다.
「창 밧긔 아해 와서 오늘이 새해 오커늘 / 東窓을 얼쳐 보니 네 돋던 해 돋았다 / 아희야 萬古한 해니 後天에 와서 일러라.」先人이 읊은 예 시조 한수를 가리어 丁卯년 새 해 ― 햇 머리에 얹혀놓고 새 해를 맞는 感懷의 일단을 펴보는 것도 항용 무용한 노릇만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어쩌거나 간에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이며 살아가는 가운데 「萬古한 해」를 끊임없이 體悉하며 「오늘이 새해」요 ― 「후천에 와서 일러라」하듯 이 예 돋던 해, 오래 오래된 만고의 해를 혹은 묵은 해로 보내기도 하고 혹은 새 해로 맞이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고이래로 수수 천억 무량겁으로 돌고 도는 시간 공간을 헤쳐나 진실로 새로 나고 거듭나서 오늘날이라는 눈부신 햇살을 저마다 머리에 이고 있으면서도 「만고한 해」의 영원하고 유연자적하며 아름다운 우주전체의 대생명으로 지금 이 나의 淸冽한 숨결이 돌고 도는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것은 우주만유 전체 생명이 더불어 나와 하나 되는 사랑의 동일질서로서 잘 살거나 못 살거나 잘 되거나 못 되거나 그게 아니면 안 되고 그것은 또한 생명을 가지고는 어쩔 수도 없이 마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일러 얼이라, 마음이라, 평상심이라, 혹은 우주의 동일질서라 이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지금 한결같이 세계가 하나 되는 시대의 유기적인 생명을 여의고서는 있을 수도 없고 무의미한 것이다.
되풀이하여 묻는 일이지만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平常心是道」라 하였다. 「平은 고하의 계급과 物我의 차별이 없는 것이요, 常은 고금의 간격과 유무의 변환이 끊어진 것이라 ― 이는 곧 우리의 자성을 가리킴이요, 우리의 자성은 곧 우주의 대도」라고 일찍이 정산 종사는 밝혀주셨다.
그러나 평상심을 지니는 것은 그다지 난삽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밤 한 그릇을 먹는다는 것과 추호도 다를 바가 아니다. 그리고 밥과 평상심의 관계와 자리는 오로지 하나다. 평상심의 원리가 가르쳐주고 있듯이 이것은 이미 일체 중생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스스로 하는 것이요 하지 않고는 마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된 근본 바탕이며 더욱 이것은 시간과 공간, 역사와 시대를 넘어서서 그 언제 그 어디서나 한결같이 함께하고 전체 우주적 생명으로 다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영원한 삶의 「主題」가 된다.
세상은 지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절망과 좌절 상태에 빠져있다. 이제 이 평상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마도 생명을 포기하여 버리고 이 우주와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고립하여 저마다 방황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평상심이라는 마음 하나를 찾고 이것을 회복하는 것은 곧 저 「만고한 해」인 우주 세계 전체의 생명 바탕을 회복하는 길이며, 이의 회복은 또한 우리가 다 함께 살아나고 거듭나는 개벽의 새 아침을 맞이하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근원적으로 함께하고 스스로 하고 전체 생명이 다 하는 마음으로 개벽하는 이가 아니면 더불어 평상심을 말할 수 없다. 한 조각 마음인들 어찌 허술히 버릴 것인가. 버릴 것인들 무엇이겠는가, 서로가 살림으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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