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계농원서만 35년간 헌신

전무출신 근산 지해원 정사가 7일 오후 2시 40분 숙환으로 중앙총부 원로원에서 76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이에 따라 중앙총부는 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故 지해원 정사의 성적이 공부성적 정식법강항마위,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준특등에 해당됨에 따라 9일 오후 1시 30분 중앙총부 기념관에서 1천여 조객의 애도속에 교회연합장으로 발인식을 엄숙히 거행했다. 장지는 왕궁 영모묘원.
이날 발인식은 김윤중 장의위원장(교정원장)의 개식사에 이어 약력보고, 전무출신 대표고사(이백철 수계종원장), 유족대표 고사, 독경및 축원문등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대산종법사의 법문(황직평 법무실장 대독)이 있었다.
대산 종법사는 『근산 법사는 숙겁에 불연이 깊었던지라 세상에서 누리는 재색명리 일체를 하루 아침에 헌신짝 같이 던지시고 쾌연히 출가하여 총부에 왔을 때 선종법사님께서는 오래두고 기다렸던 마음의 큰 제자를 만난 듯 기뻐하시며 큰 법기로서의 기틀을 다듬어 주시었고 나와도 법연이 깊어 그동안 교단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숨어서 보좌를 하였도다. 6.25로 황폐화한 숙계농원을 사수하고 중흥하라는 대명을 받고 열반하는 그날까지 37개 성상을 스승과 법과 회상과 진리와 오직 한 마음, 한 몸, 한 뜻, 한 삶, 한 법, 하나로 그 신성을 일관하셨고 그 서원과 열성은 교단의 동량이 되는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배출시켰도다. 근산법사의 일생은 대인고의 정진과 백절불굴의 의지와 신의일관과 정맥정통의 생애였도다. 빛날손 장할손 뿌리깊은 산이라, 큰 나무가 자라고 물새와 물짐승이 노닐도다. 바다의 으뜸이여! 흐름의 근원이라 물고기가 노닐도다』고 법문하고 『大地虛空心所現 十方諸佛手中珠 頭頭物物皆無碍 法界毛端自在遊』란 송으로 고인의 명복을 축원했다.
이에 앞서 대산 종법사는 8일 오전 9시 30분 중앙상주선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분향한 후 추모법문을 내리고 안이정 중앙훈련원장, 이백철 수계농원장, 황직평 법무실장, 김명덕 교무(수계농원)등으로 하여금 신의와 공익정신으로 살다간 고인의 추모담을 하게 했다.
故 지해원 정사는 1912년 8월 2일 전남 완도군 청산면 청계리에서 부친 지상호 선생과 모친 이성의화 여사의 5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완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4년간 수학했다.
근산 정사의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은 완도공립보통학교 5학년 재학시 식민지교육 철폐를 위한 동맹휴학을 선도하면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광주학생 사건이 발생하자 학생운동 지하조직에 가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1931년 일경에 체포되어 보성고등보통학교 퇴학과 동시에 옥고를 치뤘다.
근산 정사는 출감 후 고향으로 내려와 뜻있는 동지들과 농촌문맹 퇴치와 계몽운동에 주력하였으나 일제의 심한 감시로 인해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선배들과 노동조합 운동에 가담, 활동하다가 건강악화로 1년4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그 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소비조합 운동으로 미취학아동 교육자금을 마련하는 등 조국의 독립과 민족자존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해방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치안유지에 노력하던중 민족의 본의와는 달리 남북분단의 조짐이 보이자 정치에서 물러나 소작답 1백두락을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 하기도 했다.
그 후 원기 35년 39세시 광주교당 정성의행씨의 연원으로 입교, 동년 4월 중앙총부를 방문, 정산종사를 친견하고 바로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출가후 중앙총부 예무와 산업부원으로 각각 1년씩 근무한 후 「6.25로 황폐화 된 수계농원의 재건을 위해 힘써달라」는 정산종사의 유시를 받들어 원기 37년부터 수계농원에 부임, 주무, 이사, 원장, 명예원장직을 역임하며 35년동안 수계농원의 발전과 인재양성에 헌신해 왔다. 법랍 37년.
근산 정사는 원기 44년에 법호를 받았으며 원기 61년에 법사위에 승급했다.
故 지해원 정사의 종재는 4월 24일 오후 1시 30분 중앙총부에서 거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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