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훈련도량지에 대한 확신에서 선택
생의 절망 속에서 「원불교전서」보고 통곡, 스스로 입교
본관 건립 등 은생지(恩生地로)의 청사진을 구상

역사 창조의 진통 알아주는 사람 드물어도 천명으로 받들어 실현하려는 몸부림이다. 그 견디기 어려운 고뇌 속에 동반되는 시(是)와 비(非), 그러나 사필귀정이라는 엄연한 진리가 있어 비틀어진 모든 것을 바루어 주고 깨닫게 하고 있지 않은가.
작년 신도안에 소재해 있던 「삼동수양원」이 정부 시책에 따라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당면과제를 안고 부지매입에 재가 출가 모두의 고심은 고조되었었다.
이에 수원 조대진 교도회장은 「대전은 큰 밭이다. 큰 밭은 일도 많지만 그 수확도 크다. 대전 근교에 삼동원 후보지를 물색해 보라」는 종법사님의 명을 받들고 노심초사 끝에 논산군 벌곡면 양산리 천호산을 재단법인으로 이전등기, 삼동원 이설사업추진위원장이 되었다.
교단적 관심과 기대를 모으는 이곳 벌곡에 대한 조위원장의 나름대로 간직한 청사진은 어떤 것일까.
◇삼동원 후보지 벌곡을 매입하기 가지의 과정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종법사님의 명을 받들고 우선적으로 나는 그동안 실무를 보았던 사업체를 정리, 가사에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공사에 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 후 원기 68년 8월 유성에 숙박을 정하고 1주일간 심신재계하고 무아봉공으로 일할 것을 다짐하는 특별 서원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기도를 마치고 일주일이 되던 날 산책길에서 한 촌로를 만나 이야기가 오가던 끝에 앞으로 우리 한국을 크게 중흥시킬 무수한 인재를 훈련하는 정신훈련도량을 건설할 부지를 찾고 있다고 말하였지요. 그 노인은 감동한 듯 개태사 뒷산인 벌곡 천호산을 말하면서 참 주인을 기다려온 명승지라고 하며 옛날 많은 절이 있었던 터라서 정신훈련 도량으로는 더 말할 것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현장답사에 나서 둘러보았는데 여기가 바로 우리가 찾던 적지로구나 하는 확신이 서졌습니다. 그래서 이 천호산의 주광 광산 김씨 종친회 관계자와 접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총 30만평에 대하여 평당 4백원을 요구하는 종친회 측과 수차에 걸친 가격 조정이 있었으나 결국 그들의 뜻 따라 원기 69년 3월 7일 계약을 체결하고 이 역사적 작업에 문은 내가 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약금 1천2백만원을 내놓게 되었고, 삼동원 김혜봉 교무가 준비해온 2천5백만원은 그 자리에서 중도금으로 건넸지요.
◇계약한 후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여기에 대해 어떠한 신념으로 임하셨는지요?
서대전 인터체인지가 차량통제구역으로 확실시됨에 따라 벌곡 인터체인지가 굳혀지게 되고 대전에서 벌곡까지 도로 포장공사가 진행되고, 대전과 논산시내 버스 종점 주차장이 신설되었고, 호남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가 진행되는 등 부동산 경기가 활기를 띄자 김시 문중에서 해약 조건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시작되었는데 득으로 대하라는 종법사님 말씀 받들어 김혜봉 교무와 나는 4개월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기도하는 정신으로 상대방을 감화시키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아 지난 7월 13일 드디어 그들에게 7천만원의 잔금일부를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만평을 추라 총 36만평이 부지 매입을 완결했지요.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바람은 모자를 벗기지 못하지만 태양은 능히 모자를  벗긴다는 신념으로 임했고, 그래서 김씨 종친회의 강력한 해약조건에 굴하니 않고 원만한 매듭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면서 조위원장님께서 이 터전에서 일할 의욕을 일으켜준 그 바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나이가 들면서 종교의 필요를 느끼게 되어 나의 인생을 의지할 그런 종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건강이 나빠져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절박한 상태가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친지 노인이 찾아와 한방 침을 맞아보자고 하였습니다. 나는 죽으리라 마음먹고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3일을 계속 찾아와 권유하였고, 나는 마지못해 따라나섰습니다. 팔에 침을 꽂고 있을 때 내 눈에 한줄기 햇살이 비쳤습니다. 한참 바라보니 그 빛은 햇빛이 아니었고 「원불교전서」라 쓰인 책이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책장을 넘겼고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통곡을 하였습니다. 한의사는 침이 잘못 된 것으로 놀래 침을 뺏습니다. 나는 비로소 육신의 아픔이 모두 가셨고, 원불교전서를 구해왔다는 수원교당을 찾았지요.
이렇게 인연이 되어 원기 62년 3월26일 입교를 하였고 그때부터 구체적인 원불교 이해를 위한 순례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처음 방문한 총부는 원불교총부가 아닌 세계중앙총부로 보였습니다. 나는 총부와 동산선원에서 청강을 하였고 영산을 찾아가 「대종사님 일화」가 사실인지 암암리에 탐문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황폐한 자갈밭입니다. 그러나 이 도량은 옥토입니다. 씨앗을 뿌릴 때 자갈밭에 뿌려 무슨 수확을 하겠습니까? 나는 옥토에 힘닿는 데까지 씨앗뿌리는 작업에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신념이 모든 현실적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교단 어른님들께서 방아쇠만 잡아주시면 총알 노릇은 할 각오입니다.
□이 법을 만나 변화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신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요?
나는 이 공부를 하면서 참는 공부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그동안에는 불의한 일에 참지 못해 서장이나 형사도 불구하고 대질렀습니다. 그러나 세 번만 혀를 깨물고 참아보면 그 후부터는 쉽다하여 그렇게 인내력을 길렀습니다. 나는 이 공부를 하면서 당뇨병까지 얻었습니다. 수억의 금전적 손해도 보았지만 그렇다고 죽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아봉공의 이념 그대로를 실천하는 수행자적 자세를 확립한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해서인지 지금은 참는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생의 절망상태에서 새로이 내게 비쳐진 빛은 새 생명으로 나를  일으켰습니다. 날카롭게 날이 서있던 재 마음 밭에는 조금은 둥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벌곡의 앞으로 계획과 포부는 어떠신지요?
나는 그동안 한 가정을 이끌어온 가장으로서 장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전 생령을 위해 헌신하신 대종사님을 비롯 선진제위의 정신을 받들을 때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 식민지하의 암흑기였던 갑자년 (원기 19년)에 추산 서중안선생의 염원으로 현 중앙총부가 건설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갑자생인 나는 미력하지만 천단한 소견으로 벌곡의 청사진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구상해 보았습니다.
①대지 확보확장사업 ②정문건립 ③한국 노인 보양대학원설립 ④새 정신 정화운동중앙회 설립(새 정신 새 마음 수련도량)⑤세계종교 연합회관 건립 ⑥만성원 건립 ⑦본관건립 ⑧선학원 대학 설립
나의 이런 계획이 소정의 절차를 따라 가결되면 연차 계획서를 작성하여 제안 상신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나의 힘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재가 출가의 합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여러 가지로 수정 보완되어서 추진되어야 할 것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안으로 잡철을 제거하는 정진이 있어야겠고 그래서 무언실천정신을 선양, 보다 많은 인류의 새 생명의 터전이 되고 화력소가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경주할 것입니다.
역사는 말없는 가운데 진실을 잉태하면서 흘러간다. 이 흐름 속에 출범한 벌곡은 제생의세(濟生醫世)의 은생지로서 그 사명과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이 이에 모아야 하지 않을까.
신용의 반자본이라는 철학과 개척의지로 살아오신 관산 조위원장님 건강과 신념으로 이일원의 일터에서 확대되는 삶이 되시고 항상 기도 속에 영원을 영글게 하는 구도자의 초연함을 보여 주실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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