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어버이의 날, 오월 팔일. 올해도 어김없이 이 날을 맞이한다. 종래으 어머니 날이 어버이 날로 그 뜻을 합하여 터버린 것은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의 보편적인 고유감정 양식으로서 그럴만하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어느 한편으로만 편중될 수 없다는 근원적 동질성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의 어원적 표현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된 연유인지는 잘 알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주생성의 시원적 창조적 존재로서의 이 나(자아)를 낳아준 생물학전 창시자라는 사실에 틀림이 없다.
한문인 어버이 親자에 담긴 구조상의 의미는 매우 직관적인 사랑의 바탕, 그 간절한 상황을 풀이하여 주고 있다. 나무에 올라서서 자식이 돌아오는 길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모습으로 자식을 향한 어버이의 자비심절하신 사랑의 표정을 남음없이 그대로 상형한 것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할것없이 인류가 살아온 것은 순환무궁하는 자연의 환경이었고 우리네 어버이의 모습 또한 저 자연을 응대하는 것과 같이 늘 평범하고 자명한 것일 수 밖에는 없고, 나무위에나 올라서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늦도록까지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의 귀로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그 우수어린 마음에는 그 누구인들 한치의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네 어버이는 내면적으로는 단순하고 절대적으로 촌스럽기까지 하는 자식에 대한  강한 아집이 있고 그리고 참으로 인간적인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버이의 인간과 사랑 그 지극한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리겠는가. 이렇게라도 말하려 하는 그 자체부터가 어쩌면 망상에 가깝다.
그렇다고해서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어버이날을 기하여 무슨 말을 해야하는가. 더구나 이 헤아릴 수 없는 무시광겁의 세월속에서 그리고 지구의 극동인 한반도라는 이 미묘한 땅에서 하필이면 어버이날이라는 이렇듯 평범한 속에서도 더욱 평범한 날을 정하여 기리자는 그 의의는 무엇이겠는가. 이 또한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지극한 뜻이 있는줄 안다.
어버이에 대한 말씀은 여기에서 다 매거하기 어렵지만 그 관념적인 인륜도덕이나 생물학적인 우생의 논리를 되풀이하고 뇌까린들 무슨 효용성이 큰 것도 아니다. 어버이라는 이 우주적 총체적 시원의 사랑은 물론 관념으로 전통적인 맥으로 다만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겠으나 그것은 자생적이고 본질적인 것, 근원적인 존재성 그 전체생명 자체인데도 이에 대한 절대적인 존엄성이나 도덕적인 가치가 송두리째 뿌리 뽑히고 무너지고 있다.
생명의 근원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을뿐 아니라 그가 으뜸의 가치로 절대의 도덕적 질서로서 속속들이 총섭해주어야 한다는 그 사랑의 당위성이 무엇인가에 지금 소리없이 말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절의 현실적 시대상황을 바르게 보아야하고 이 엄청난 괴멸에대응하는 고차원의 정신적 자세가 여기에서 눈부시게 활현되고 전체 자성의 바탕이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 언제 그 어디에서나 일체 중생 일체 인류가 중생으로서 사람으로서 어버이로서 자식으로서 마침내는 저마다가 생명의 공동체로서 생명의 자격으로 상생과 보은의 사랑에 떳떳하게 참여하고 헌신하는 마당에서 이 일을 개벽의 대공사를 차단하는 원인 행위자는 누군가. 배은행위를 극복하면서 근원에 합일하고 돌이켜 세우는 일에는 추호도 소홀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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