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그릇, 정화淨化 능력 탁월

현대사회에서 도자기로 불리우는 그릇의 원뿌리는 신석기시대 무문토기이다. 가장 원시 상태의 신석기시대(기원전 6천~5천년)는 자연에서 채집한 태토를 600도 정도의 온도로 구워 사용했으며, 청동기시대(기원전1천년)가 되면서 인공적으로 조합한 태토를 700~900도로 구워 내는 연질도기(Earthen ware)의 수준으로 발전하며, 좀 더 단단하고 실용적인 그릇으로의 발전은 환원번조에 의한 경질도기(Stone ware)가 삼국시대에 생산되면서 시작되었고 곧이어 유약을 입힌 회유도기로 발전된다.

이렇게 우리나라 도자기의 발전 단계가 토기에서 연질도기, 경질도기 그리고 잿물을 유약으로 처리한 회유도기의 순차적 변화를 거쳐 통일신라시대 후기(9세기)에 자기질 청자를 완성시켜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자기 생산국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도자기 생산 기술은 지금으로 설명하려면 초 하이테크 최고급 기술이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사기장을 대량으로 납치한 가고시마, 후쿠오카 일대 번주들의 손에 의해 드디어 자기국으로 편입된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 도자기는 쇠퇴일로를 걷다가 조선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영·정조에 의해 백자의 전성시대를 맞았지만 근대화에 접목하지 못한 국운의 쇠퇴로 인해 일제 36년의 강점을 거치는 동안 그 전통의 맥이 끊길 정도로 쇠퇴하게 된다.

반면 일본은 세계 근,현대사가 말해주듯 임진왜란 때 납치해간 조선 사기장을 통해 자기 생산을 본격화하면서 당시 세계 최대 자기 수출국이었던 중국이 임진왜란의 후유증에 의한 우산퀴의 난, 즉 명과 청의 교체기에 최고의 도자기 도시 경덕진이 불타는 바람에 유럽 수출이 두절되면서 조선 사기장에 의해 생산된 고급 청화백자를 유럽의 중심 상권의 기지였던 화란(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출하게 된다.

1659년 이후 18세기 중엽의 100여 년간 일본은 370만개 이상을 유럽에 수출하였고, 봉건왕조에서 근대 산업국가로 탈바꿈하는 유럽의 산업혁명기의 세계 문물을 도입하면서 차근차근 근대국가로 발전하게된다. 그렇게 일본이 도자기를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바로 조선에서 생산되어진 고려다완이란 아주 특이한 그릇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본을 도자기에 빠지게 한 '고려다완'. 그 신비한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도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많은 분들이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그 기록도 흔적도 없었다. 모두가 일본에서 연구해낸 그리고 발표한 기록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 기준대로만의 모방에 만족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고려다완'이란 그릇의 실체가 우리의 그릇이 아닌 일본 사람의 그릇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 실체를 우리의 역사에서 밝혀보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필자가 밝혀나가는 고려다완의 실체는 필자의 연구기록을 중심으로 한 것임을 먼저 밝혀두고자 하니 이점 오해없으시기를 바란다.

먼저 고려다완이 왜 일반 도자기와는 다른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일본에서 말하는 '고려다완'은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일본에 건너가 사용된 찻그릇(말차)을 통칭해서 일컫는 명칭이다. 그 중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 이도다완(정호)이라 붙이는 찻그릇이다.

이 찻잔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일본의 최고 권력자의 손에 의해 보물로 취급되면서 오늘의 일본 차 문화의 근간인 와비사상을 탄생시켰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한 조선 사기장 및 기술자 납치의 배경에 당시 일본 사회에서 임진왜란 60여년 이전부터 이도다완(정호)에 대한 구매 열풍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일본 귀족 사회에서 이 같은 열풍이 일어났을까?

필자가 유추해 낸 것은 이 그릇이 독살을 막아내는 잔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그릇은 숨 쉬는 그릇이기 때문에 정화하는 능력이 다른 그릇보다 탁월하였고, 독을 정화하면서 그 기능에 매료되었을 것이란 필자의 생각인 것이다.그리고 사용하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보고 차인들의 관점에서 본 자연사상인 와비사상의 모습을 접목했다는 것이다. 숨을 쉬면서 독을 정화하는 기능, 세월이 가면서 변화하는 모습에서 자연의 일체감을 찾았던 차인들, 그런 도자기를 자기들 와비사상에 맞는 최고의 도자기 찻잔으로 승화시킨 결과가 일본 도자기 국보 1호로까지 명명하면서 오늘의 고려다완(이도)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밝힌 대로 고려다완(이도)에만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 과학적 증명이 가능한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런 도자기가 생산될 수 있는 배경은 좀 특이한 역사 문화적 배경이 있는 지역에서 생산되었을지 모른다는 필자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지역신문인 사천문화신문을 운영하면서 정말 우연히도 우리 관내인 경남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구룡저수지에서 옛 가마터가 1995년에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곳의 역사는 1000년전 고려 8대 황제 현종과 그 아버지 왕욱(안종)이 기거했던 아주 기막힌 사연이 있었던 곳으로(얼마 전 KBS사극 천추태후에서 잠시 소개되기도 했음) 이곳에서 발견된 가마터는 우리의 잃어버렸던 옛 민요가마터였으며, 400년전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그릇을 굽다가 일본에 잡혀가 아가노야끼를 개요한 존계선생의 옛고향 가마터임을 밝히는 바이다.

그리고 일본 후손과 행정기관이 나서서 이곳에 한-일 우호의 비를 2002년 세운 바 있으며, 필자는 이곳에만 있던 신비한 흙을 찾아 전통가마를 만들어 이곳의 흙만으로 고려다완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지금도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들은 필자가 발표한 책 〈천년의 혼 고려다완 그 뿌리를 밝힌다〉에서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 김남진/고려다완 도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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