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교화 서울연합 청년회
종법사님의 격려와 훈증으로 사기가 진작
몸살앓던 청년회, 전담교무 만나 활기 찾아
땅콩팔이로 봉공정신 일깨우고 동지들 일체감을 형성
연합청년회 전담교무로

지금으로부터 18년전 원기 51년(1966년), 그 당시 서울에는 서울 ㆍ 종로 ㆍ 원남의 세 교당밖에 청년회가 없던 시절. 그 3교당 청년회는 연합회를 결성하고(회장 : 장동윤) 월1회 연합청년 합동법회를 보았던 기록을 살필 수 있다.
그 당시 연합청년회는 소수의 교당청년회보다 3교당이 통합된 뭉쳐진 힘을 바탕하여 청년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단일 서울지구 청년회는 하나 되기 이전 3교당의 교무님이 법회를 책임 분담해 주시는 것으로 되었으나 막상 자체 교당을 떠난 청년회는 우선 바쁜 일손에 밀려나 소외되고 법회운영이 부실해지자 청년들은 총부에 지구청년회 전담교무님 파견을 요청했었다. 시간이 흘러도 응답을 얻을 수가 없자 청년들은 자기들의 충정을 교단에 알리기 위해 서명 날인된 연판장을 종법사님께 올리기로 결의하는 다급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나는 대학원(동국대) 논문을 제출하고 막 숨돌리려던 참이었다.
당시 지구청년회의 모임장소가 종로교당이었고 이런 어수선한 청년들의 움직임을 보시던 종로교당 법타원 김지현 교감님은 나에게 저 물끓듯하는 청년회를 가라앉혀야겠으니 내년 정식임사를 맡을 때까지 우선 임시 청년담임을 맡아야겠다는 심각한 어조의 말씀이 계겨서 나는 서울지구 청년회의 임시교무가 되었다.
원기 53년(1968년) 11월 어느 토요일. 서울 지구 청년법회에서 나는 부임인사를 하였다. 그동안 큰 몸살을 앓던 서울지구 청년회는 퍽 수척한 모습으로 많은 회원들의 손실이 있었던지 3교당이 합한 모든 청년회원들은 34명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회원들중에는 나와 두 세 살 아래인 박환정 부회장을 비롯 이윤중, 윤을중 동지등도 청년회원이었다. 오늘의 청운회 전신이었던 청우회(원기 55년 7월16일)를 발족하여 직장청년들이 서울지구청년회를 떠나자 회원구성원은 대부분이 대학생들이었다.
땅콩팔이와 인재발굴
부임하자 손을 맞잡을 젊은 일꾼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우선 일꾼을 발굴하기 위해 부임한 한 달 남짓 뒤에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땅콩팔이를 하는 계획을 세웠다. 담임교무가 몸담고 있지도 않은 종로교당에서 큰 수선을 피우며 한가마 반의 땅콩을 작은 봉지를 지어 그곳에 나누어 담았다. 축제분위기인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거리로 청년들은 땅콩을 팔러 나섰다. 추운 겨울밤, 길가는 행인을 붙들고 땅콩을 파는 일은 고생스러웠겠지만 들고 나간 땅콩봉지를 다 팔아버린 청년회원들은 팔린 땅콩대금을 내놓고 또 더 많은 땅콩봉지를 들고 신나는 모습으로 교당문을 나서곤 하였다. 아주대학교 고연찬 박사도 그때 당콩팔이 외판에 열을 올렸던 회원으로 기억된다.
그때 땅콩을 팔아 벌었던 이익금으로는 한국 보육원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털모자를 사주었고 때마침 나라에서는 헬기 기금을 모금하던 때이라 이익금의 일부는 국방을 위한 헬기헌납금으로 신문사에 기탁하였다. 땅콩팔이 큰 일을 치르고 나니 누가 진실한 일꾼이며 누가 열심히 일하려는 동지인가를 가려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직 많은 땅콩을 팔아야겠다는 한 마음, 한 몸으로 움직였던 회원들도 일체감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었다.
8개월만에 배이상 증가
그러나 얼마 후 종로교당에서는 학생법회가 지구청년 법회시간 때문에 지장을 받으니 다른 교당으로 옮겨갔으면 좋겠다는 딱한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임시청년회 교무가 된지 2개월 후에 새로 시작되는 사직교당의 교무발령을 받았지만 한칸방을 빌려 지내는 때라 서울, 원남 두 교당 가운데 새 자리를 잡아야했다. 교통도 편리하고 새로 신축된 원남교당으로 옮겼으면 하는 청년들의 소망이 이루어져(그 당시 원남교당 교무님은 승타원 송영봉님ㄴ) 그 후 줄곧 지구청년회는 원남교당에서 법회를 보았다.
원기 54년(1969년) 7월에 대산 종법사님께서 요양차 우이동에 있는 호타원 최행덕님(원남교당) 별장에 계실 때 청년회원들은 종법사님을 배알하러 그곳에 갔다. 종법사님께서는 많은 청년회원들을 접하시고 대견스러워 하셨고 청년들은 종법사님의 격려와 훈증의 말씀에 힘입어 한결 사기가 진작됐다.
그때의 젊은이들을 사진에서 헤어보니 70명(남 39명, 여 31명)이었다. 교화를 시작한지 8개월만에 청년회원들은 양적으로 어느 수준에 올라섰다.
신진대사가 빨라
교화대상중 청년만큼 신진대사가 빨리 이루어지는 계층도 없을 것이다. 나는 법회마다 불어나는 새 회원을 익히느라 그들의 이름과 고향, 학교, 학년 그리고 그들의 특징을 「얼굴에 점, 노란 머리, 안경」등으로 표시한 옛 수첩을 들쳐보면 웅성대던 옛 기억이 아련히 되살아 난다.
청년회원들은 서울대학생이 가장 많았고 고려대학생과 그리고 이대, 숙대생이 많은 편이었다. 법회 때 젊은이들에게 경강이나 설교를 하면 모래밭에 물을 붓는 듯 내 말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흡수되는 것 같았고 단상의 나와 100여명의 젊은이가 함께 호흡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나 그때는 외래 강사가 시간내에 도착이 않되면 그 순간에 위기를 넘기느라 단상에 올라가도 나는 열정적으로 그들에게 할 말이 많았다.
법회마다 불어나는 청년회원은 교화부장이 신속히 각 단에 배치하여 철저히 관리하였고 법회가 끝나면 항상 원남교당 옆 성도다방으로 몰려갔으니 그곳은 우리 청년들의 아지트였다. 회원들은 단활동을 통해 젊음의 대화가 소통됐고 용수철처럼 솟구치는 젊음의 열정과 지적욕구, 그리고 토론하고 싶은 자기주장도 단활동을 통해 수렴되고 소화되었다.
생동감 넘치는 단 활동
원기 56년(1971년) 11월 6일 서울지구 청년회에서는 자체 프로그램에 의하여 청년문제 세미나를 열었다.
1단, 11단, 12단은 청년활동의 기본지침을(발표 : 유종기), 2단, 4단, 10단은 사회참여를(발표 : 김재철) 3단, 9단은 지도자론을(발표 : 우관엽) 5단, 8단은 일반프로그램을(발표 : 정형원) 6단, 7단은 특별프로그램을(발표 : 이성관) 주제로 하여 각각 발표하였다.
이 세미나에서의 제언을 요약하면, 1. 원불교학을 학문으로 수립하기까지 지켜만 볼 것인가? 2. 중앙청년회의 활동은 지나치게도 아리송하다. 3. 청년은 변화를 상징한다. 프로그램에 다양성을 지녀라. 4. 원불교는 변화를 싫어하는 것 같다. 5. 지도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라. 6. 종교인이 사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제생의세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그 당시 이희선, 박정원군이 구상하여 알차고 짜임새 있는 내용으로 진행하였으며 단일청년회에서는 처음 시도되었던 프로그램이다. 각단 단장, 중앙들은 리더쉽이 강하고 매우 유능하였다.
청년회원들을 매월 1일 밤이면 사직교당에 모여 정례기도를 올리며 신앙의 세계를 깊이 하였고(평균참석 40~50명) 방학때면 아예 도시락을 준비한 청년들이 역시 사직교당에 모여 염불, 좌선, 대종경 토론등 긴 하루를 정진하는 「하드트레이닝」이라는 프로그램을 가졌는데 이때는 조종인 동지가 애정을 갖고 노력하였다. 열띤 토론, 깊은 세계로 함께 몰입되던 청년회원들은 이 프로그램 후반에는 「오픈마인드」시간을 가져 동지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고 겉으로 싸두었던 두터운 껍질을 벗겨 법정과 법연의 밀도를 높이기도 하였다.
한편 영어실력을 쌓기 위하여 고영란양등이 주축이 되어 서머셋 ㆍ 모음의 「써밍엎」을 열심히 공부하던 모습도 방학을 알뜰하게 보내던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교무 ㆍ 강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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