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귀 하늘 입 -- 교단언론의 활성화를 위해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교정을
수위단과 대중이 한마음 이뤄야
왕의 귀는 길다

신라 경문왕은 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르자 갑자기 그의 귀가 길어져서 마침내는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그래서 그는 늘 귀를 복두로 싸매고 다녔다. 이렇게 왕은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으므로 왕의 귀가 긴줄은 아무도 몰랐다. 궁인이나 왕후까지도 몰랐다고 하니 비밀이 얼마나 철저히 지켜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로지 한 사람 왕의 복두를 만드는 사람만은 왕의 귀가 나귀의 귀처럼 긴 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밀을 누설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지엄한 명령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평생을 이 비밀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복두를 만드는 사람도 이 비밀을 안고 그대로 죽을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죽을때가 가까워오자 그는 아무도 없는 도림사의 대숲으로 들어가서 『왕의 귀는 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뒤로 대숲에서 바람이 불면 『왕의 귀는 나귀 귀』라는 소리가 서라벌 골골로 흩어져 갔다. 많은 사람들이 왕의 귀에 얽힌 비밀을 눈치채게 되었을 것이다. 왕은 노발대발해서 대숲을 없애 버렸다. 그 자리에는 산수유가 숲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산수유 숲에서 『왕의 귀는 길다』란 솔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에 대한 좋지못한 소문이 퍼져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권력을 가졌거나 갖지 않았거나 관계가 없다. 다만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비밀을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방송이나 신문을 검열하고 「보도지침」으로 묶어서 진실을 왜곡하려고 애쓰지만 어디 될 법이나한 수직이던가. 원불교교전 대종경에 말씀이 있다. 「작은 재주로 작은 권리를 남용하는 자들이여! 대중을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지 말라. 대중의 마음을 모으면 하늘마음이 되며 대중의 눈을 모으면 하늘눈이 되며 대중의 귀를 모으면 하늘귀가 되며, 대중의 입을 모으면 하늘입이 되나니, 어찌 대중을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리요」
교단 언론의 역할
원불교는 교리와 제도와 조직이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민주적이라고 생각된다. 민주주의라고 하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기본정신으로 하겠는데 이와같은 민주주의의 정신이 원불교에서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교리상에서 보면 처처불상 이상으로 인권을 숭배하는 사상을 찾기가 힘들고 대각 해탈 중정의 삼대력으로 대자유를 누리고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교육 공도자숭배로서 인권과 지식교육과 생활을 평등하게해서 이른바 「전반세계」를 구현하자는 것이 사요이니, 원불교는 민주화의 근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상 싶다.
그런데도 민주화의 물결이 한반도를 넘실대고 있는 오늘에 와서 원불교 교단이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그렇게 많지 않음은 실로 부끄러운 대목이다. 이는 교단지도자의 안이한 태도내지는 소극적인 자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권력이 두려워서였을까?
교단의 정책이 과연 민주적으로 수립이 되고는 있는 것일까? 어떤 근거와 바탕위에서 교단 제2대말까지 1천여개의 국내교당을 목표로 했을까. 제2대말을 맞은 오늘날에 와서 무지개 꿈으로 변하고만 1천여개의 교당에 대해서 당국자의 해명이 없어도 될까? 희망사항과 계획을 구별하지 못한 탓일까. 어찌 1천여개의 교당문제 뿐이던가.
갖가지 설계가 무지개 꿈으로 변한 지금, 당시의 계획과 오늘의 실정을 비교해본다면 누구나 허탈감에 쌓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단정책의 수립과 실행이 전교도의 슬기와 힘의 합력이 없었기에 벌어진 결과이다.
수위단은 교단의 얼이요, 교단의 중심이다. 수위단은 생사를 초월하고 마군을 항복받은 성인들이다. 수위단의 마음은 하늘의 마음이요, 수위단의 눈은 하늘의 눈이요, 수위단의 귀는 하늘의 귀요, 수위단의 입은 하늘의 입이다.
그러니만큼 수위단의 일동일정은 전교도의 나아가서는 전인류의 더 나아가서는 전생령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위단회의 사항이 자세하게 보도되는 경우는 많지 못하다. 보도될만한 가치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왕의 귀는 길다」와 같이 보도되어서는 안될 회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수위단회의가 「원불교신보」에 공고된다. 그런데 의제는 「당일상정」이다. 의제를 당일 상정해서 진지한 논의가 가능할까? 의제를 미리 발표해서 자료를 모으고 준비를 해서 보다 합리적인 결정을 해야하지 않을까?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의 의견도 수렴한다.
「왕의 귀는 나귀 귀」라는 말이 새어나갈까를 두려워해서 회의의 공개를 꺼리는 수위단회라면 문제가 있다. 그런 수위단회라면 이미 대중의 마음과 눈과 귀와 입과는 괴리된 것이다.
대중과 수위단, 그것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대중의 마음이 수위단의 마음이 되고 대중의 눈이 수위단의 그것이 되었을 때 참수위단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방과 대중, 시방과 수위단, 대중과 수위단은 하나로 묶어져야 한다. 그 작업을 원불교 언론이 맡아야 한다. 대중의 뜻이 원불교 언론을 통하여 수렴이 되어야 하고 수위단의 움직임이 터럭 끝만큼이라도 숨김이 없어 원불교 언론을 통하여 보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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