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식사당번
서울교당에서 자취생활로 학업을 계속

 그당시 원광대학은 초창기로 여러 가지 면에서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던 때다. 숭산종사께서 학장님으로 계셨고, 불교교육과와 군문과등 2개 학과만으로 발족을 한것이다.
 처음나는 교학개설 강의를 하면서 도서관장으로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교수로서 자격은 없었다. 1년 근무를 한후 숭산학장님을 비롯 대학에 있는 전무출신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회의를 하였다. 회의에서 합의를 본 것은 앞날에 대비해서 자격을 갖추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정식 4년제 대학을 나와야 하므로 우선 2명을 선발했다.
 초창 당시대학 서무과장은 한산님이었고, 민산님과 정고선선생님이 전무츨신으로 강의를 했었다. 이분들 중에서 나와 정조선선생이 일차로 서울동국대학에 편입하기로 결정을 했다. 유일학림이 학과 과정으로 인증을 받아 동국대 불교교육과 3학년으로 편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졸업하고 돌아오면서 한산 ㆍ 민산님이 제2차로 갈 것을 전제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가 정고선생과 함께 용산에 있는 서울교당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 이때 서울약대에 다니고 있는 이건진 (열반 高山宗師의 子)선생과 함께 셋이서 어설픈 식당번을 하며 학교에 다녔다.
 나는 그때 이미 결혼을 해서 정토회관(김성윤)은 고향 정읍에 있었다. 그리고 교당 교무생활등 사회생활을 한후라서 다시 학업을 시작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낮에는 학교에 가 강의를 듣고, 밤으로는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관에 다니게 되었다.  물론 정고선선생과 함께 을지로6가에 있는 학원에 다니면서 무엇인가 꼭 좋은 결실을 맺어 보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한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되었을때 총부에 내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학원에 다니면서 영어공부에 열중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만 안되었다. 첫딸을 낳은 정토회원이 병이 나서 특별치료를 해야 한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병명은 폐결핵 이었다.
 말하자면 방학동안만이라도 내가 보아주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나는 할수 없이 공부계획을 포기하고 내려오게 되었다. 후일 정토회원은 내게 미안해 하며 『당신이 하고 싶은 영어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위중한 병세가 호전되었고, 나는 학업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우리 자취생 세명은 당번을 정해 놓고 밥을하게 되는데, 거의가 된장찌개로 떼웠다. 서울교당 법당뒤에 있던 창고를 주방삼아 밥을 지었다. 세명 모두가 학생들이라 시간에 쫓겨 채소나 기타 다른 반찬을 해먹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는 위장병이 있어 늘 소화불량이었다.
 어느날 내가 식당번이 되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오전에 법회를 보고 점심 후에는 모처럼 서울운동장에 구경가자고 약속을 했다. 그래서 법회가 끝나자 마자 자취방에와 식사를 하려고 찬장에 있는 밥통을 열어보니 쥐가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생각하면 아까운 밥이었지만 나는 상당 부분을 덜어내고 남은 밥만 가지고 셋이서 나누어 먹었다.
 전차를 타고 운동장에 가는 도중 정고선선생이 체했는가보다고 해서 전차에서 내려 약국에 들려 소화제를 사먹었다.
 나역시도 속이 편치않아 같이 약을 먹었다. 이때 건진선생은 친구들과 만난다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운동장에 돌아와 우리 둘이 저녁을 먹는데 건진선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궁금 하지만 별다른 생각없었는데 전화가 왔다. 병원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라 뛰어가 보니 독물중독이라고 했다. 독약을 먹은 쥐가 밥위로 지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인 것은 내가 당번을 하게 되어 많은 양의 밥을 위에서 덜어 낸것이다.
 스스로 밥하고 김치 담고 도시락 싸가지고 학교에 다니면서도 이리에서 올라가 이화여대에 다니고 있었던 성보영, 김복균(현재 두분 모두 정토회원)두 여학생들과도 가끔식 만나 등산도하고 영화관에도 갔던 일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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