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받들고 비로소 인과를 확신
新村교당 日陀圓 金如日華교도

 아직까지도 갈수 없는 이웃고을 개성에서 입교하고 그후로 줄곧 끊임없이 신앙생활을 하며 삶의 터전을 닦아오신 日陀圓 金如日華(84세) 정사님.
 『그떄가 원기 24년 이었습니다. 이천륜씨 사랑방에서 법회를 보고 있었는데 저는 스스ㅗ 찾아가 입교를 했고 이듬해에 익산총부에 가서 대종사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날 대종사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는데 다음날은 여전히 평상시와 다름 없으셨고, 다만 「이세상에 불쌍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수의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내가 아직 입지 않은 옷이 있으니 가져다 입히고 장사 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교도는 이법에 귀의하기전 평소 불교에 나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집살이 하느라 선뜻 다니지 못하고 있던차 천륜씨로부터 「불법연구회」소식을 듣고 경전이 없느냐고 하여 얻게 된 것이 「육대요령」이었다.
 『시어머니께서는 함부로 다니지 말라고 하셨지만 융타원 김영신 법사님께서 개성교당 초대교무로 오셔서 법회를 보는동안 생각이 달라져 그동안 집안에 모셨던 신주단지를 모두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돈암정에 집을 사서 교당으로 수리했는데 이때 시어머님께서 집값의 거의 반을 희사하시기도 했지요.』
 이렇게 해서 귀의하게된 김교도는 3개월 총부선에 참가하게 되어 대종사님의 법문을 받들며 가까이 모시는 기회르 가졌다.
『처음 뵈었을 때 너무 원만하시고 잘생긴 성안 그리고 태산같은 풍채에 고개를 들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자비훈풍으로 가득하시지만 또 어느때는 산천조목도 떨리는 듯 어렵고 엄격하신 모습을 뵈올 수 있었지요. 모처럼 조시에 가면 과일을 내놓으시며 먹으라고 하셔도 감히 그앞에서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법회를 통해 많은 깨우침을 받고 자업자득의 인과보응의 이치에 대한 확신를 갖게 되었다는 김교도는 아직도 생생하게 대종사님의 성음을 기억하고 있다고.
 『어느날인가는 대종사님께서 「이 공부 잘 해보라」고 하시며 「내가 둘러먹는 사람 아니니 나를 믿고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업장을 녹히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사 괴로운 일로 대종사님 앞에서 울기도 했는데 이럴때면 손수건을 꺼내 같이 울어 주셨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에서 20세에 첫딸 (麗陀圓李恩淑 신촌교당)을 낳고 그후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된 김교도는 이로부터 인간적 고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대종사님께 일일이 말씀드리지 못하고 함께 가슴아파하시며 김교도의 세정을 알아부셨다는 것이다.
 6 ㆍ 25직전 개성 시가지에 들려오는 포성에 불안해진 김교도 가족은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피난 시절에도 초량교당법회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여일하게 신앙생활을 해오신 김교도는 남편과 딸 사위(李聖雄)까지 입교시켜 일원가족을 만들었다.
 『총부선중에 아침 좌선시간이면 대종사님께서는 소리도 없이 오셔서 돌아보셨고 기운뜨는 것을 보시고 수양정도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제도하셨는데 사실 저는 그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간만 채웠지요.』
 사위가 병이 나서 어려웠을 때, 김교도는 딸과 함께 기도드리자 하여 약물치료도 효과가 없던 병세를 호전시켜 주위를 놀라게한 일도 있었다.
 『대종사님 백주년행사때 그 누구보다도 감회가 깊었습니다. 총부에서 고회당을 비롯 서너채의 집들이 있었는데 오늘날 눈부신 발전상을 보니, 꿈만 같았습니다. 이제 사업은 할 수 없고 열심히 수양에 전념하려고 합니다. 어느때닌가 다음생에는 여자몸 벗어야겠다고 어는 교무님께 말씀드렸는데 그 교무님께서 남녀라는 생각도 놓아버리고 오직 성불하겠다는 일념만 가지고 정진하라고 하셔서 그날로 남녀에 대한 생각을 거두었습니다.』
 어떠한 순역경계가 와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신심에 변함이 없지만 특히 금전에는 안넘어갈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김교도.
 지금도 원불교신문과 원광을 보며, 좌선과 기도로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김교도가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옛 개성교당을 돌아볼수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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