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리드 = 현재보다 나은 새몸 받으려는 능동적 노력이 천도
죽음은 변성과 불변성의 교환 작용일뿐
삼학수행통해 의 주체자로 확연히 나투어져야
. 죽음의 극복

 1. 천도
 원불교에서 죽음 자체는 극복 되어져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져야할 현상이라했는데 그렇다면 죽음의 극복이란 필요 없다는 의미일까. 다시한번 교리 근본사상과 연관 시킨다면 죽음을 단지 ()과 ()의 교환작용이라 했다. 이 교화작용을 당사자의 의지대로 좀 더 나은 교환을 해 보는 노력이 바로 원불교에서 제시하는 죽음의 극복의 의미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죽는자가 죽음에 이끌리는 피동적인 자세 보다는 스스로가 죽음을 주재(?)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표현으로는 설사 이 몸은 죽어가나 인 은 영원히 멸하지 아니하고 다시 새로운 몸을 받아오게된다는 진리 속에서 다시 새로운 몸을 더욱 좋은 조건으로 바꾸어 보려는 능동적인 노력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천도인 것이다.
 천도는 글자 뜻 그래도는 옮겨놓는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옮기는가 하면 첫째로 죄에서 복으로, 고에서 낙으로, 미에서 깨달음으로옮기는 것이다.
악에서 선으로 악업에서 성업으로, 에서 로 옮겨가는 것으로 악을 그치고 선을 닦아 복을 얻는것이다다음으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고뇌에서 안정으로, 집착에서 해탈로, 속박에서 자유로운 옮겨가는 것이니 고를 떠나 낙을 얻는것이다.또한 어둠에서 밝음으로  번뇌에서 로에서 로 중생에서 부터로 옮겨가는 것으로서 미망을 굴려 깨달음을 여는것이라는 의미의 천도는 두가지가 있으니 스스로 하는 천도와 타인에 의해서하는 천도(세전)이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죽음의 극복은 당사자의 문제이므로 자신의 천도가 되겠다. 대종사님께서 천도에는 생사가 다름이 없으므로 죽은 후에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 생전에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으리라(천도품 38장)고 하셨는데 정산 종사님께서도 천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이 평소에 본인의 천도를 위하여 적공을 하는 것 (생사편 6장)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볼때 능동적인 노력을 위한 자신 천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인가. 욕실을 떠나 마음을 발하는 서원과 밉고 사랑스러운데 끌리지 아니하는 청정일념 (생사편8장) 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기 마음을 밝고 조촐하고 바르게 길들여, 이  가운데 출입하되 물들고 섞이지 아니할 정도에 이르면 남을 천도하는 데에도 큰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생전에 자기의 천도를 마쳤다할 것 (천도품 38장) 이라고 하셨다. 청정일념은 의 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자신 천도에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을 마칠때 최후일념이 내생의 제일종자가 되어서 그래도 움이트고 나오는 것 (대종경선외록 15장) 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자기 마음을 밝고 조촐하고 바르게 길들이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성과 정성을 다하여 항상 심지가 요란하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어리석지 않게 하며, 항상 심지가 그르지 않게 하는 것 (천도품 27장) 이라고 하셨다.
이어서 이렇게 하고 보면 지옥 중생이라도 천도할 능력이 생기는 것 이라고 하셨다. 결국 자신이 천도할 궁극적인 방법은 인 것이다. 삼학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의미의 죽음의 극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산 종사님께서도 를 해결하는데에 세가지 계단을 들으셨는데 하나는 본래에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아닌 자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요, 둘은 본래에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체받아 지키는 것이요, 셋은 본래에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베풀어 활요하는 것이라, 이 세가지 계단의 실력을 구비하여야 생사대사를 완전히 해결 하였다 하나니라 (생사편 1장)고 하셨다. 결국 삼학인 것이다.
 죽음의 극복에 관한 문제를 원불교에서는 살아있을때의 인 삼학수행과 같은 문제로 귀결짓고 있음을 알수 이다. 이것은 곧 잘 사는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다는 이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잘 살았을때 많이 그 삶의 일단적인 마침표를 능동적으로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원불교에서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유일신 종교와 기타 다른 아시아 종교와 아주 다른 극복요건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죽음이후에 다른 세계가 존재 하거나 현상세계를 부정하고 긍극적 실체만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하는식의 죽음 극복이 아니라 이 현상세계 자체내에 존재하는 삶의 양식에서 영과 육을 통하여 이상적인 방향을 한해 열심히 살면 그것이 바로 죽음을 극복하는 걸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상적인 방향이란 곧 삶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해결해 주는 것이기때문이다. 교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이 으로 부단히 나아가는 삼학수행을 통하여 의 주체자로 스스로 나투어져야 되는 것이다. 이 길 만이 진정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맺음말
삶의 문제는 곧 죽음의 문제이다. 따라서 삶의 본질이 곧 죽음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에서 이 문제들을 보는 관점과 극복해야할 요건들을 제시해 왔다. 이것은 결국 각 종교가 내세우는 근본사상과 연관 지어져 제시 되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통하여 현실에 무관심하고 긍극적인 종교적 실체만을 추구하거나 인간 본래 존재의 모습을 구현해 내기 위하여 지나치게 관념적인 양상등을 볼 수 있었다.
런데 원불교는 근본사상이 삶에도 죽음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져 어느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근본사상자체가 현상과 실체를 동시에 수용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은   의 끊임없는 작용()을 통해서 근원(  이 나와진 )의 으로써 의 실현자체가 되야 한다는 교리자체는 다른 종교에서 보여주는 죽음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원불교 현실 긍정적이면서도 기타 종교에서 내세우는 긍극적 실체를 동시에 추구하는 ()종교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현실주의적도 아니고 내세 지향적 혹은 궁극적 실체 추구만을 위주로 하는 종교나 교리가 아닌 것이다.
 의 근본사상이 로서 으로부터 ,  로 이어지는 순환과 정의 하나하나 연결 되어지는 이치는 결코 을 하지 않고는 여실하게 볼수 없고 단지 이해만을 할 수 있듯이 그리고 그 이해정도에 따라 불교윤리인 자비, 을 행할 수 밖에 없듯이 원불교에서도   의 작용관계를 여실히 알지 못한채 결국 우리는 대종사님의 가르침대로 이 (정신수양 사리연구)으로 이 으로(사리연구 작업취사)행할 수 밖에 없다. 이때의 은 결국 자신의 이해 정도에 따른 것이므로 완벽하게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하고 행하게 될 때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상당한 시간이란 그 실천이 완전히 몸에 배어 애써 행하려고 아니해도 그대로 법대로 행할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행히도 원불교에서는 이 을 아주 용이하게 완성시킬 수 있는 원리가 제시되어져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정기, 상시훈련법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훈련법도 궁극적으로는   의 작용관계를 여실히 실현하고자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의 작용관계란 대종사님께서 서품1장에 말씀하신 내용이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생멸없는 는 이고 인과보응되는 이치는 인 것이다.
하고 변하는데 어떻게 변하느냐 하면 인과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불교 을 설명함에   , 인과보응, 등으로 나열함을 볼수있는데 이것은 결국 같은 논리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
 <교무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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