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의 문학세계
-대종경을 중심으로-
그 소재의 고유성 보다 그 의식의 진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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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졸저「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에서 대종사님의 문학세계에 대해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미 진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종경」을 중심으로 문학성을 논하기로 한다면 좀더 부연할 바가 없지 않아서 다시 붓을 들었다. 다만 「대종경」안에 들어 있는 한시에 대해서는 같은 책 「선시론」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하고 산문쪽만 대상으로 삼아 논의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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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경」은 「정전」과는 달리 대종사의 친제가 아니라 열반 후 제자들이 편찬했다는 점에서 여타 종교의 경전 결집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경전류는 그 체제나 구조로 보아 두부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교조의 언행을 사안별로는 상황(시간ㆍ공간) 별로든 종합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정한 교휸을 단편적으로 직서하는 방식이다. 전자는 아무래도 장황해지기가 쉽고 군더더기와 장엄이 많은 반면 전반적 상황 설정이 전제돼 있어 현장감이 있고 더욱 감동적이다.
후자는 간결하고 매끈한 에퍼리즐의 명쾌한 전달을 통해 밀도 있는 감명을 심을 수 있는 반면, 어록이란 것이 대개 그렇듯 그 추상성과 도식적 수사로 인해 메시지 자체가 공허하게 드릴 수 있다. 대체로 원시 불경이나 기독교의 4복음서가 전자에 속한다면, 「논어」나 증산도의 「대순전경」은 후자에 속한다. 이 둘은 장단점이 있어서 이해득실을 논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문학적 시각에서 본다면 전자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대종경은 후자에 속하고, 그러므로 문학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속한다. 게다가 대종경 기술은 구체적 상황을 의도적으로 기휘한 협의가 있다. 우리는 대종경의 기술 중에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한사람이…」「하루는…」등으로 시작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이는 문학적 가치척도에서 본다면 부저적이다. 아무리 그 사람이 이름까지 밝힐마늠 중요한 인물이 아니더라도, 또 그 하루가 어느 특정한 날이라 밝힐 이유가 없더라도 그렇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이 6하원칙을 갖추고 나온다면 얼마나 싱싱한 현장감을 가질 것인가. 다음을 비교해 보자.
 A, 한제자 어떤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거늘…(인과품10장)
 B, 대종사 하루는 조송광과 전음광을 데리시고 교외 남중리에 산책하시는데 길가의 큰 소나무 몇주가…(불지품20장)
 누가 누구에게 왜 어떤 봉변을 당했으며, 분을 못이기는 언행은 어떤 식으로 표출됐는가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이 문학이다.
뒤엣것은 「하루는」이나 「교외」에 흠이 있긴 하지만 앞에것에 비하면 한결 구체적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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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불리한 조건을 감안하고서 다시 「대종경」을 법설의 형식에서 논의할 수 있다. 필자가 전술한 저서에서 분석한 대종사 법설의 저개 방식은 ①직설적 법문방식 ②기존전적ㆍ고사의 실례 인용 ③비유를 통하는 방식 ④우화나 예화를 이용하는 방식 ⑤ 문답법의 활용 등이다. 이 가운데 ②③④에 속하는법설들이 문학과 밀전하다.
특히④의 경우가 가장 주목할 대목이니, 예컨대 「인도품」30장에 나오는 「술 좋아하는 성성이」이야기 같은 것이다.
 둘째, 「대종경」의 내용과 문장이 자체로서 자족적으로 문학성을 갖추는 경우와 문학 창작의 동기유발이 가능한 자료로 기능하는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교단품」 24장에 나오는 「가게 벌이고 외상 주는」이야기는 「신약」의 마태복음 25장이나 누복음 18장과 대비되는 것으로 그 자체로서 문학적 가치를 가진다면, 「교의품」15장의 「노인 부부 실지불공」사연은 작가에 의해 소설로, 희곡으로 창작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셋째, 「대종경」을 문학작품 창작을 위한 자료제공처 또는 아이디어의 창고로써 관념할 경우, 「대종경」의 문장과 내용을 원문으로 간주하여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과, 그 근거 자료를 추적하여 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대종경」의 내용 태반은 월말통신 월보 회보 및 개인 수필 등으로부터 추출초록한 것이며, 그 문장은 원문을 가감 수정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대종경」문장이 훨씬 세련되었다 할 수도 있고 대종사 법설의 본의를 정확히 전하고 있다. 할 것이나, 다른 경우는 소박하고 정리가 덜된 대로 원문이 더욱 문학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식화한 「대종경 보다 그 이전의 꾸밈 없는 원문을 근거로 하여 창작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된다. 예컨대, 「변의품」31장에 나오는 후천개벽을 위한 수운ㆍ증산ㆍ 소태산의 역할 분담에 관한 법설을 「대종경선외록」원시반본장 20장의 수정되지 않은 원문과 대비해 보면 어느것이 보다 문학적인가는 자명해진다.
 넷째, 「대종경」내용 중에는 독창적 내용 외에, 기존 전적이나 구전으로부터의 인용이나 차용이 혼합되어 있는데 이를 문학적으로 다룰 때 어떻게 볼것이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원불교 문학의 독창성은 그 소재의 고유성보다 의식의 진보성, 사고의 참신성에서 보장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원불교의 공유한 소재 독창적 내용이 아닌것, 예컨대 「변의품」의 「짚신 세 벌」우화, 「불지품」의 「진묵스님」일화, 「신성품」의 「구정선사 전설」등도 원불교적 안목으로 재해석하고 원불교적 시각으로 재조명하여 창조적으로 수용한다면 원불교 문학으로 손색없이 승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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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경」은 그 장중하고도 유려한 문체만으로도 경전 문장의 모델이 됨직하거니와 내용에 있어서도 문학적 향기가 드높다. 그러나, 이를 그 자체로서 평가하고 고정시켜버린다면 원불교 문학의 창조적 발전은 불가능하다.
 「동남풍 불리는 법」(교의품37장), 「수레의 두 바퀴 같은 정치와 종교」(교의품38장) 「광대소리 잘하는 친구」(수행품11장), 「송덕비 계교하는 부자」(인도품54장) 「13세각의 견성 인가」(성리품18장), 「일경을 감화시킨 대종사」(실시품11ㆍ12장), 「약장수일지 (日之」(실시품29장) 「세계 유람자의 자녀들」(전망품13장) 등등 좋은 자료들이 본격적인 문학 작품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대종경」을 영원한 샘, 깊이 모를 심연으로 보고 거기서 한없이 맑은 시정을 퍼 올리고, 진진한 이야기의 실마를 낚아 올려야 할 것이다. 그가 진정한 천재라면 「요훈품」한 구절에서 받은 시선한 충격만으로도 훌륭한 시를, 소설을 희곡을 엮어낼 수 있을 것이다.
李敬植 <도봉교당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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