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김대근 법사편 5
제우지 교화
선공후사의 알뜰한 주인공들
소소영령한 인과를 체험

 사진>화해교당에서 다산 김근수법사님을 모시고 청년회원들과 함께. 앞줄 우측에서 세 번째가 필자.
 나에게 있어서 수지교당의 생활은 특별했다. 님보다 늦게 출가했던 나는 매사를 법도에 맞게 행하려고 각별히 마음을 쓰면서 생활했다.
 특히 법회를 준비하는데 모든 정성을 쏟았다. 수지교당에서 생활하면서 연마했던 교리를 중심으로 한 설교 안들은 금년 2월초에 <설교집>으로 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6년 간의 수지교당에서의 생활은 그대로 교화의 실적으로 나타났다.
 청년교화에 각별한 정성을 쏟았던 때문인지 나중에는 그동안 함께 법회를 보아왔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회를 결성, 청년법회를 따로 보기도 했다.
 청년체육대회나 교리퀴즈 등을 할 때는 당시 남원 교당 청년회보다도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등 수지교당의 주인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좌포가 고향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아름답고 소중했던 내 젊은 날의 추억은 대부분 수지교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수지를 스스럼없이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내 젊음을 송두리째 던졌던 수지교당의 생활을 청산하고 화해교당으로 부임한 것이 원기 54년 4월이었다.
 나는 법산 이백철법사의 후임으로, 법산은 성산종사님을 모시고 재무부차장으로 갔다.
 화해교당은 교단 사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성지였다. 내 민족을 구하고 세계를 바로잡는 큰 일꾼이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당시 신흥종교의 본거지인 전북 정읍으로 오셨던 정산종사님을 원기 3년 대종사님께서 팔산 김광선 대봉도님을 대동, 친히 찾아주셨던 제우지 화해리는 나에게 새로운 교화의지를 심어줬다.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이어서 였을까. 교도들이 너무도 순박했다. 논에 모를 심어도 교당 유지 답에 먼저 모를 심고 난 이후 비로소 자기집 논에 모를 심었다. 교무가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기 만한 교도들로 나는 수지교당에서 느끼지 못했던 도 다른  재미를 맛보았다.
 화해리에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후처를 통해 아들을 얻은 강씨는 유달리 그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어느해 겨울 감기를 앓던 아들이 진료소에서 주사를 맞던 중에 충격으로 죽었다. 아들을 잃은 후 강씨는 사람이 달라졌다. 실성한 듯 죽은 아들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강씨를 주변사람들이 측은하게 생각했던지 하루는 이장이 강씨를 데리고 와서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강씨에게 특별천도재를 지내자고 했다. 재를 두 번 지내고 난후 강시가 말하기를 선생님, 제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오랫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집니다라고 했다. 천도 재를 지내고 난 후 강씨는 본래의 모습을 찾았고, 천도라는 글씨를 새긴 대형시계를 교당에 희사했다.
 천도 재를 계기로 입교해 교도가 된 강씨는 그 후 본처에게서 늦둥이 아들을 얻었는데 나에게 찾아와서 교무님 전에 죽은 아들놈이 다시 왔습니다. 꼭 그놈입니다고 기뻐했다.
 를 라고 잘못 알고 시계에 적어 희사한 강 교도는 그 뒤에 알뜰한 교당의 주인이 됐다.
 상극의 악연으로 왔다가 대도정법의 위력을 빌어 상생의 선연으로 다시 온 것으로 나는 확신했다.
 한번은 정읍교당에서 재를 지내고 화해리에 도착하고 보니 캄캄한 밤이 됐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남을 천도하고 온 내가 이렇게 어둠에서 헤매이는 구나, 전등불에 의지해 길을 찾아가듯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영생 길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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