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녀들에게 시계하나만은

 대종사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원기 28년, 3월 26일 총회가 열릴 때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총부에 오게 된 서면교당 타원 김정윤 법사님(69세). 그때의 인연으로 변함 없는 신심과 공부심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대종사님을 친견했던 그 소중한 법연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고종 사촌언니(열반이정혜법사)의 소개로 원불교를 알게되어 초량교당에서 17세에 입교를 했습니다. 그때 교무님은 공타원 조전권 법사님이셨는데, 제가 전무출신 하겠다고 말씀드리니까 공타원님께서 총부에 여쭈어보고 알려주시겠다고 하시고 총회에 먼저 가셨지요. 얼마 후에 올라오라는 연락이 와 저는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서서 생전 처음으로 전라도 당을 밝고 익산 총부에 도착했습니다.
 유성 출가한 김 교도에게는 구로부터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집안에서 난리가 나게 되었고 그 소식이 총부에 퍼지자 주위에서는 김 교도에게 집에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한마디씩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귀 기울이지 않고 굳굳하게 대종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생활했다.
 마지막 법문을 하셨던 5월 16일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각전으로 가는데 어쩐지 뒤를 돌아보고 싶어 보았더니 대종사님께서 걸어오시어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법회에서 뵈온 대종사님은 유난히 인자하게 보이셨습니다. 법문 내용은 대종경에 수록되었지만 제가 기억되는 것은 남이 장에 가니 따라서 나도 가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느냐하시며 올바른 공부 길 찾아서 공부하라고 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어느 날인가 병환 나시기 약 10여일 전쯤 대종사님께서 학원 생들이 공부하고있는 선방에 오시어 두루 살피시고는 저에게 집에 가고 싶지 않느냐 물어 보셨습니다.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을 했는데 대종사님께서는 한숨을 쉬시면서 정윤이 같으면 한 3년만 가르치면 될텐데 저것들은 어떻게 할꺼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학교에 다니지 않고 출가한 사람들이 있어서 낮에는 산업부나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한글과 한문공부를 하고있는 실정이어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김 교도가 대견하셨을 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는 조실에서 부르셔서 갔더니 집에서 돈을 보내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총부에 간 것을 반대하고 오라고 야단이 났는데 돈을 보내 줄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대종사님께서 제가 총부에서 공밥 먹고 있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을까 봐 그런 방편으로 쓰셔서 저를 안심시키셨던 것입니다.
 때는 일제말기라서 일경들의 압박은 더욱 심해졌고 성씨말살과 언어까지도 단절시키고 일어를 사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는데, 총부도 이러한 외세의 시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일인들을 대하시면 서도 싫어하는 빛이 추호도 없으셨고 언제나 평화로운 미소로 그들을 대하고 접견하셨다고 김 교도는 회고한다.
 대종사님께서 병환이 짙어지시자 서둘러 이리병원에 입원하시도록 절차를 밟았는데 병원으로 가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학원생들을 조실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가서 뵙지 못했는데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대종사님께서 앞으로 정녀들은 다른 사치는 못해도 시계 하나만은 차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철저하게 시간 생활하는데 어김이 없어야 하므로 대종사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된다. 그 귀하던 시계가 오늘날은 얼마나 일반화되었는가. 새삼 세월의 무상함과 물질의 풍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김 교도는 불과 2개월 정도 총부에서 대종사님을 모시고 법문을 받들었지만 이대 심어진 신근은 일생을 통해 순역경계 간에도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대종사님 열반 후 집에서의 후원도 없는 터에 대종사님 처럼 살펴주시는 분도 없어 생활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병이 나고 말았으나 추호도 집 생각은 나지 않았다.
 제가 아프게 되니까 주위에서 걱정들을 하며 집에 연락을 해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주위 동지들에게 나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던가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대중생활의 염려로 집에서 알게 되어 어머님이 오시어 절대로 시집은 안 보내겠다고 하시고 김천언니 집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이로써 출가 인연을 다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서둘러 그 해 12월 김 교도를 결혼시켰다. 마음에 없는 결혼생활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없이 남편을 따라 만주에 가서 살았고 대동아 전쟁 당시 평양을 거쳐 무사히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김 교도는 만주에서 귀향하려고 할 때 꿈에 대종사님을 뵙게 되었고 배지 두개를 주시어 받았는데 그 후 출발해서 큰탈 없이 고향에 안주하게 되어 대종사님의 가호 하심이라고 생각한다.
 살기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남편이 교당에를 못 가게 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로부터 총부에서 생활을 전해들은 남편은 저를 교당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저는 남편에게 왜 남의 자유를 구속하느냐고 따져 결국 허락한다는 각서를 받고 교당에 나가게 되었지요.
 대종사님 당대의 교도로서 갖는 긍지와 신심은 김 교도로 하여금 어떠한 경계에도 굴하지 않게 했으며 서면에 교당을 창설하는 주역의 임무를 스스로 맡게 했던 것이다. 초창 당시 김 교도는 교당 터 1백20평을 교도들의 협력으로 매입하고 남은 부채를 책임지고 21년 동안에 걸쳐 갚았다. 이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13번이나 이사를 하면서도 오직 이 공부 이 사업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서면교당 김정윤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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