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기쁨
집안 몰래 친구와 영산에 가서 하룻밤을

 그렇게 다니고 싶어서 다니게된 간이 학교가 폐교도어 나는 그나마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향학에 대한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바로 밑에 남동생(남주)이 다니는 읍내 보통학교에 다니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뜻을 실현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내 가슴은 소리 없이 타기만 했다.
 어느 날 남동생 담임인 다니구찌 선생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다니구찌라는 여선생에게 나는 학교에 전학 할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선생은 대뜸 부모님 허락을 받았느냐? 물었다. 나는 아버님은 반대하시지만 어머님께서는 허락하셨다고 말했다.
 나는 그로부터 이 여선생에게 공을 들였다. 일본사람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토란을 캐게 되면 나는 둥글고 맛있는 좋은 것만을 골라서 깨끗이 씻어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가을이면 밤을 따서 이것도 좋은 것으로만 가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이 계기가 되었든지 나는 남동생과 같은 반인 5학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편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나는 4km나 되는 학교를 다녀도 조금도 멀다고 느끼지 않았고 훨훨 나는 듯이 다녔다. 그러기 때문에 집에 와서는 집안 일을 빈틈없이 했다.
 아침이면 동생들 도시락을 싸주는 일은 물론 밥을 해먹고 학교에 다녔으므로 제대로 방에 들어가 식사하지를 못했다.
 부엌에서 대강 때우고 학교가 늦을까봐 뛰어가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부엌일을 했지만 열다섯살 때부터 미싱을 배워 동생들 옷을 해 입히는 등 나는 정말 어느 한순간도 무료하게 지내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드물었다.
 이렇게 열심히 학교에 다니는 즐거움으로 나는 다른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6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님께서 병환이 나셨다. 아이를 낳은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시름시름 앓으시던 어머님께서 드디어 열반을 하시고 말았다.
 그 당시 위로 두 언니들은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집안에는 내가 제일 맏이가 되었고 새할머님이 계셨다. 그래서 집안살림살이는 거의가 내 몫이 된 셈이다.
 나는 어머님 열반에 대한 슬픔을 오래 간직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동생들 보살피는 일, 학교에 다니는 일, 살림 등으로 한가한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친구인 김홍국이를 따라 처음으로 도양교당에를 가게 되었다. 홍국이는 초량교당 김보신 교무 사촌언니여서 원불교에 대한 이해가 많았고 집안 적으로도 모두가 교당과 한 집안으로 통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도양교당까지는 2km정도였다. 도양교당에는 홍국이 아버지(김공안)께서 출장소장(현교도회장)을 하고 계셨다.
 그 날 처음 교당에 갔을 때 나는 새로운 말씀을 듣게 되었다. 살생을 하지 말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 는 등 계문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나에게는 퍽 신선하게 들렸다.
 그 후 홍국이는 가끔 나에게 불법연구회이야기를 했다. 둘이는 늘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할 수 있을까하는 대화를 자주 나누었는데 홍국이가 어느 날 너나 나나 진학은 못할 테니 영산으로 도망가자고 하였다.
 학교에는 백군과 홍군이 있었는데 백군은 진학을 못하는 반이었고 홍군은 진학을 하기로 한 반이었다. 우리는 그 홍군 반이 너무 부러워 항상 시간만 나면 그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그런데 영산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몰래 달아나자고 홍국이는 나를 유혹했다. 도양교당을 다녀온 후로 토요일이면 찾아가 육대요령에 대한 설명도 들었고 한문도 배웠다. 그래도 집에서 도망치려는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홍국이는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둘이는 날을 잡아 식구들 몰래 현지 답사 차 영산을 가게 되었다. 교통이 불편한 때라 우리는 당일로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영산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행한 일대 모험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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