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향한 신문의 역할

 현대를 가리켜 언론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기자를 무관의 제왕이라고 칭한다. 위대한(강한)민족일수록 누구의 힘으로도 억압할 수 없는 거대한 신문들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한국보다 강한 나라 미국을 보더라도 제퍼슨은 일찍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는 활자화한다는 뉴욕 타임주의 사시가 미국의 언론을 대변할 만 하다.
 과거 미 부통령 애그뉴가 세금포탈의 결과로 자리를 물러났고,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종래 퇴임하고 만 것은 언론의 끈질긴 고발과 투쟁의 결과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의 앞에는 국가 원수에게도 필 봉을 꺾이지 아니하는 미국의 언론정신을 밝은 내일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투쟁한다는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관은 민의 피조물이란 관념이 우세하기 때문에 자유를 위하여는 촌보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이 미국인의 건국이념이자 애국관인 것 같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국민인 것 같다. 자유가 피를 요구할 때에 두려워하면 자유란 누길 수 없는 구호로 변해 버리고 만다.
 권력이 호랑이가 아니라 민중이 호랑이인 미국의 정치풍토가 부럽기만 하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언론의 위대성이 엄존하는 한 영원하리라는 것을 믿게 해 준다. 과거엔 민족에 그치던 신문이 오늘날에는 민족에서 시작하여 세계로 연결되는 신문으로서의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교단 적인 면에서나 국가적인 면에서 인류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을 불러 일으켜야 할 우리라고 볼 때 우리 신문의 책임이야말로 크다 하겠다.
 첫째로 곱을 수 있는 사명이란 그 역사성이다.
 신문이란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연결하는 금시의 초점이라고 볼 때 그 날 그 날의 기사들이 먼 후일에는 우리 교단과 민족과 인류의 역사로 엄존하고 다시 미래를 제시하는 거울이 되기 때문에 신문의 역할이 교도와 국민과 인류의 기대와 성원에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미래를 향한 꿈을 주어야 한다.
 세상인심이 각박해지고 민족이 방황하게 되고 교단이 어수선 할 때일수록 그리워지는 것이 위인의 손길이요 지도자의 가르침이다. 이는 시의 고금, 장소의 동서를 가릴 것 없이 동일한 인류의 철칙일 것이다.
 오늘 이 사회는 군중 속의 고독처럼 외롭고 험난하다.
 이 모두가 정신과 물질의 갈등, 이성과 감정의 불일치에서 오는 결과요 자제정신의 결여에서 오는 비극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대성은 미래를 향한 꿈을 지닌 데 있다.
 그 꿈이 당대에 이루어져도 아니면 영원한 내일의 숙제로 남아도 꿈은 항상 오월의 푸른 새싹처럼 싱그러워서 좋다. 희로애락과 다사다난 속에서 더러는 울고 더러는 웃고 많은 세월들을 고뇌와 번민 속에서 지내며 늘 속았구나 하며 사는 존재가 인간인가 싶다.
 인물됨이 클수록 성실과 노력을 강조하고 인격이 높을 수록 청운의 꿈과 미래를 향한 야망을 가지라고 격려하는 것이 인간사의 진면목이며 신문의 역할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올 때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벗과 친지들의 안부를 묻고 송수영신의 정을 나누며 새 날을 다짐하곤 한다.
 셋째로 역사의 새날은 사고하는 지성을 통하여 그 의미가 깊게 부여되고 창조하는 지성으로 인하여 새롭게 부각되며 행동하는 지성으로 말미암아 역사에서 다시 새 역사 속으로 강하게 이어진다고 볼 때, 사고와 창조와 행동의 지성이 오늘처럼 필요한 때가 없다고 본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능력을 통하여 만물의 영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창조의 능력을 이용해서 이 위치를 계속해서 누렸으며 행동하는 능으로 인하여 앞으로 무한한 역사의 주역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신문은 정의에 힘을 주고 힘에 정의를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시대를 조명해야 할 지성이 정의로운 힘을 지녔다면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인류를 괴롭히는 신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양심이여, 지석이여, 깨여라! 하는 톤이 높다. 지성은 역사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격이다. 그러므로 그 사회와 역사에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떳떳치 못함이 올바름에 접근치 못하는 사불 범정의 진리는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며 이 염원이 신문에 바램이다.
 과거 깊은 학문에 몰두하였던 우리의 선조들은 차라리 청백하여 가난함을 즐기고 가난 속에서도 안락한 마음을 지니고 구차한 중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안빈낙도의 생활을 선비의 덕으로 기렸던 그 시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고에 수혈을 가하고 행동에 균형을 잡아 주어 사고와 행동이 조화를 이룰 때 이 시대의 불균형이 정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새 날의 지성은 이성적 소리를 들으려는 의 인간이어야 하고, 도덕적 실천력을 겸비한 의 인간이어야 하며 종교적 신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의 인간이어야 한다.
 새날은 우리를 향하여 수지 아니하고 밀려오고 있다. 이날을 위하여 우리는 사고하는 지성의 깊이를 지녀야 하고 창조하는 지성의 수고와 노력을 배워야 한다.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광명 대로를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새날이 어서 우리 앞에 와야 하고 그리고 그 앞에 역사의 지성으로 굳건히 설 수 있게 하는 신문이 교단의 3대를 열어 가는 새날의 역사가 우리에게 내리는 준엄한 명령이 아닐까 한다.
 칸트가 철학의 문제로 제시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교단을 위해서, 우리민족을 위해서 우리가 서 있는 공간과 시간 즉 이 세계를 위해서 진리(법신불)앞에서 엄숙성으로 풀어야 할 역사의 준엄한 숙제를 풀어야 할 때가 바로 3대라고 말하면 어떨지.
이제성 <교무서울서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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