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기<교무샌디애고 교당>
법명과 군번

 지금 한국사회는 문민정부가 등장하여 개혁바람을 일으키며 신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민들의 박수갈채를 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서북강풍으로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기득권 세력의 처참한 몰락이 국민적 대 화합에 금이 가지 않도록 그 어느 때보다도 동남풍이 필요한 시기일 듯도 싶습니다.
 원불교학과 2학년을 마치고(28년전) 본인은 군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3년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습니다. 총부기숙사 생활 2년후 신도안에서 동산 스승님을 모시고 야학교사로 봉사하다가 군에 입대하니 오히려 더 잘먹고 편한 생활이 되었습니다.
 남들은 논산훈련소 훈련병 생활이 일생 중 가장 힘들고 고된 추억의 하나라 하지만 나에겐 잠도 더 많이 자고 식사도 풍족하였으니 당시의 신도안 실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도안에서 육신은 말할 수 없이 고달팠으나 법열에 넘쳐흐르던 초발심자 박성기로 불리던 법열은 사라지고 군대에서는 11498894라는 군번과 일등병이라는 계급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총부 기숙사에서는 10인 1단으로 금강단 정진단 등 명칭으로 각단에 소속되었는데 군대에서는 부대 2중대 1소대 군번 11498894 박일병으로 숫자가 나 자신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성직자 이민으로 미국에 발을 디딘 이후로는 사회보장 번호, 운전면허 번호, 자동차 등록번호 등 더 많은 숫자를 암기해 두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서구문화와 이드로부터 파생된 군사문화는 모두 정보가 숫자로 대표되는 숫자문화입니다. 시, 문학, 종교, 철학을 낳은 문자문화는 이들에 비해 말할 수 없는 열세에 처해있는 것이 오늘날 지구를 뒤덮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인은 재벌보다 못살기 마련입니다. 숫자문화가 강세를 때는 현대사회에서는 숫자에만 더욱 민감해지다보니 분석적 사고방식만 발달하여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인심은 더할 수 없이 각박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숫자의 홍수 속에서 의미의 상실로 인한 모래알 같은 세상에 살게 된 것입니다. 법명을 수여 받으면서 인생의 새로운 삶의 탄생이 시작되었으나 군번이란 숫자가 매겨지므로 서 한낱 전쟁의 소모품에 불과한 전쟁도구로 전락되었던 것입니다.
 숫자문화의 소산인 군사정부가 퇴진하고 문자문화의 문민정부가 등장하여 얼마나 한국의 도덕문화를 소생시키고 풍요한 정신문화를 재창조해 낼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아야겠습니다. 숫자에 밝은 대서양의 서구문화가 점차 몰락하면서 가장 풍부한 문자를 갖고 있는 한자 문화권인 중국 일본 대만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주도하는 모습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동남풍이 가볍게 불며 호랑나비들이 춤추는 따뜻한 봄날씨라는 표현보다는 섭씨 20도라는 간단한 표현에 더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숫자문화에 중독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부터 삭막한 숫자공해를 추방하고 정과 뜻이 넘치는 문자문화, 말씀의 문화, 법문의 문화를 건설했으면 합니다. 입교숫자가 얼마며 법회 참석 수는 얼마라는 숫자 노이로제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겠습니다.
 구역집회의 참석수자에 급급한 L.A의 장로 한 분이 예배후 음란비디오를 보여 준다하여 참석숫자를 배로 올렸다는 서글픈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법회에 교도가 몇 명 나오는가 묻지 마시고 교도님들이 마음공부 어떻게 하는가하고 물어주시면 숫자노이로제로 스트레스 안 받고 신명나는 수행 담을 늘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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