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도둑으로 손꼽히는 인물이 마틴 카힐이다. 그는 1949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은행금고를 털었고, 미술관을 통째로 털었다. 그가 총탄에 맞아 45세에 숨질 때까지 훔친 물건의 값어치는 공식 확인한 것만 6천만 달러(약 7백50억 원)에 이르렀다.

익산총부의 초창기 시절, 산업부원 한 사람이 계란을 익산 읍내에 나가서 판매하는 일을 맡아왔는데 그때마다 1전씩 빼 자기 통장에 예금하다가 탄로가 났다. 교단에서는 이를 중대사로 알고 그를 즉각 전무출신에서 탈퇴시켰다. 소태산은 이에 보통급 2조에서 "도둑질을 하지 말며"라고 하였다.

그러면 주변에서 도적질이 왜 생기는 것일까?

탐욕에 의한 소유욕이 발동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 삼독심이 이와 관련된다. 불교 오계의 하나가 도둑질을 말라는 불투도(不偸盜)이다. 불타 당시에 잔인한 도적 '앙굴리말라'가 있었는데 그는 불타의 심법에 감화를 받아 삼독심을 제거하고자 불제자가 되었다.

도적이란 부정적 개념에 더하여 의적(義賊)이라 하여 긍정적으로 비추어지는 성향도 있다. 조선조 연산군 시절 홍길동은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행세를 하였던 것이 이와 관련된다. 장길산이나 임꺽정 역시 조선조 3대의적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도적질은 의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용될 수 없다.

무엇보다 도적질은 사회에서 중죄가 되는 범죄이다. 그것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남의 물건을 훔치려는 행위로서 인과의 법칙에 어긋나며, 결국 무거운 형벌로서 형사적 책임이 뒤따른다. 구타원 종사는 이에 <회보> 51호(1939)에서 말하기를 "돈에 환장이 되어 도둑질을 하다가 경관에게 잡혀 곤욕을 당한다"고 하였다.

이른바 도둑행위는 사회에서 근절해야 하는 당위성에 직면한다. 이에 대종사는 '견물생심'을 말하며 초기교단의 엿목판 도둑사건을 거론한다.

총부건설 당시 엿장사를 한 관계로, 엿목판 간수에 조심하라고 하였는데 제자들이 방심해 이를 도둑맞은 것이다. 이에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크게 꾸지람을 하였다(대종경, 실시품 4장).

이따금 일선교당에 도둑이 든 경우가 있다고 한다. 불교 사찰에도 도둑이 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대종사의 엿목판 분실의 교훈을 되새겨 보면 각 교당에서는 견물생심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주역> <계사전>에서도 "간수하기를 게을리하는 것은 도둑을 가르치는 것이라(慢藏而誨盜)"고 하였다.

하여튼 금은보화를 소유하려는 탐욕에 구애받지 말고 '허공법계'를 소유하는 심법이 되어야 한다. 대종사는 "누가 이 가운데 허공법계를 완전히 자기소유로 이전 증명낸 사람이 있느냐"며, 범부 중생은 형상 있는 물건만을 자기소유로 내려고 탐착하므로 그것이 영구히 제 소유가 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아까운 세월만 허송하고 만다(성리품 26장)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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