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상황에도 인재 양성해야
유일학림 시절 3년 동안 강의 받들어

 내가 대종사님을 처음 뵈 온 것은 60년 전인 원기 17년 9월 내 나이 여덟살 때이며, 정산종사님을 뵈온 것은 원기 20년 9월이었다. 두분 부처님을 큰 어려움 없이 내 고향 부산 하단에서 뵙게 된 것이다. 연수는 다르지만 똑 같은 9월에 뵈 온 것은 우연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9월에 뵈 온 것은 우연이 아니고 싶다. 그래서 9월이란 내게 더 없이 소중한 달로 기억하고 있다.
 정산종사님께서 우리 고향에 오시게 된 것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김기천 종사님께 하단 교당(현 당리교당) 초대 교무로 부임하신 후 재직 시 그곳에서 순교하셨기에 묵산 박창기 대봉도와 함께 오셔서 삼산종사님 시신을 총부로 운구 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나는 전무출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대동아 전쟁이 치열하여 총부에 청소년들이 많이 거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종사님의 하명에 의하여 원기 27년 3월 남원 교당 공양 원으로 가게 되었으며 원기 28년 6월 1일 청천벽력 같은 대종사님 열반 소식을 듣고 총부에 도착, 두 번째로 정산종사님을 뵙고 되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어려움을 겪다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그해 9월 이리 역전과 서울에서 귀환동포 구호사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리 팀에 합력해 구호사업에 동참했다. 13개월 동안 추진한 구호사업이 끝나자 이듬해인 원기 31년 5월부터 총부에서 유일학림 1기로 수학하게 되었다.
 3년동안 공부하면서 식량난 등으로 존폐문제가 여러 번 부딪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다하더라도 인재만은 양성해야 한다.고 하시며 굳은 집념으로 이끌어 주셔서 무사히 수학을 마칠 수 있었다. 이 기간동안 철이 없어서 정산종사님의 머리를 뜨겁게 해 드린 일이 많아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수학시절 총부의 어려움 등으로 학원생들 중 말라리아를 앓다가 폐결핵으로 누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정산종법사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며 조회시간에 나오시어 항상 웃고 살아라하셨다. 학원생 중 잘 웃는 사람이 있어 지정하시며 웃으니 참 좋다. 그러나 까닭 있게 웃느냐 까닭 없이 웃느냐물으시고는 항상 웃되 까닭 있게 웃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종사님을 뵈었을 때는 위대하시고 또 자신이 어려서 어렵기만 하였으나 정산종사님은 수학기간중 오전시간을 이용 정전강의를 직접 받들면서 가까이 모시고 생활한 관계인지 더욱 친밀감이 있었으며 인자하신 어버이요 스승님으로 느끼며 살았다. 또한 3년 세월에 혹은 꾸중으로, 혹은 칭찬으로 대종사님의 정신을 저신 저골이 되도록 알뜰히 키워 주셨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큰 은혜를 느끼고 있다.
 한번은 조실 앞을 지나가는데 너 영훈씨 집에 가서 영훈씨 조실로 좀 왔다 가라고 하고 오너라하셨다. 나는 말씀대로 전하고 내 볼일을 보았다. 조금 있으니 조실에서 찾는다는 전갈이 와서 아무 생각 없이 갔다. 정산종사님께서 너 심부름 보냈더니 어찌 되었느냐?물으셔서 오신다고 했어요하니 심부름을 갔으면 온다든지 못 온다든지 내게 와서 말을 하고 너의 볼일을 봐야지 않느냐. 다음에 꼭 그래라하시어 너무 죄송했었다.
 어느 날 정산종사님이 부르셨다. 너는 운동도 않고 책만 본다면서하시며 글공부를 많이 해도 공사를 등한시하면 되겠느냐. 내일부터 고구마 밭에 가서 하루에 1시간씩 풀을 매라고 하셨다. 평소 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예하고 대답하고 나서 날마다 저녁때 고구마 밭에 나가 풀을 맸다. 그랬더니 한번은 밭에 나오셔서 사물에도 밝아야 한다.하시며 저고리 할 줄 아느냐하시기에 잘 못합니다하니 내 손수건 하나 만들어 오너라하셨다. 그때 손수건은 네모반듯한 베를 실 몇 올씩 빼 가지고 얌전하게 감쳐서 만드는 때라 감도 없고 만들기도 어려워서 결국 해드리지 못해 지금까지 한이 된다. 평소 사물에 어두운 나를 가르치기 위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유일학림을 졸업하고 지방에 부임할 때 부르셨다. 내 나이 스물 다섯이라 걱정이 되신 것이다. 지방에 가서도 책만 보고 앉아 있지 말고 두루 살피라고 당부하셨다.
 지방에 살다 총부 조실에 인사를 갔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상황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셨으며 벽에 걸린 액자를 가르치시며 너 저 글의 뜻을 알겠느냐? 교재 정비기관확립정교동심달본명근의 뜻을 명심하라하시며 설명해 주신 후 모든 공부 중 마음공부가 제일이니 외화보다 마음 공부로써 안으로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법문해 주셨다.
 특히 정산종사님께서는 6.25 동란 때 총부도 어려운 상황인데도 어리고 젊은 교무들이 지방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잇는지 사람을 보내어 모두 살펴, 지도하시어 한사람도 빠짐없이 품에 안아주셨다. 대동아 전쟁6.25 등 너무 어려운 시대에 교단을 맡으시어 결국 중환을 얻고 고희를 못 넘기시고 우리 중생을 위해 앞서 가셨다고 생각된다.
 정산종사님의 성안에는 항상 잔잔한 미소가 가득 우리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며, 넓으신 도량과 경륜으로 지도해 주셔 여러 가지의 교훈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도록 해 주셨다.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주신 교훈 중에 첫째 신의로써 영겁을 잇고 둘째 평상 심으로써 늘 한결같이 하며 셋째 자신은 공물이니 닿는 데로 베풀라는 말씀을 더욱 간직하며 살고 있다.
 끝으로 스승님께 보은을 다하지 못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세세생생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의 뒤를 따를 것을 더욱 다짐한다.
정리 : 유용진
바로 잡습니다
 본문 713호 내용 중에 성선설을 성악설로, 성악설을 성선설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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